<으뜸상>

아들의 귀대

부슬부슬 늦가을비가 내리던 날, 3박4일의 휴가를 마친 작은 아들이 부대에 복귀했다. 휴가를 얻어 집에 들어올 때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집을 나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 채 말수가 적어졌다.
나는 그런 아들의 등 뒤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러대고 말았다. 군복을 벗어던지고 온 방안을 사정없이 어질러놓은데 대한 불만이 삼일동안 참았다가 한꺼번에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네가 어질러놓은 방 꼴 좀 봐. 전쟁이 나도 이러지는 않겠어! 다 치워놓고 가!”
아들은 아무 말 없이 후딱 방청소를 해치운다.
집에서 1시간 남짓 걸리는 부대로 아들을 태우고 가면서 내가 한 잔소리가 목에 걸린 가시 같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까짓 것, 어차피 청소할건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잘 참았다가 마지막에 꼭 일을 그르친단 말이야.’
부대 앞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보니 아들이 의자에 쓰러져 잠들어 있다. 30분쯤 푹 자게 해도 될 만큼 시간이 있어 그냥 곤하게 자도록 내버려 두려고 했는데, 서행을 알아차린 아들은 다 왔구나 하며 눈을 뜨고 만다.
“엄마, 저 갈게요.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가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나는 꼬박 석 달을 감사에 대해 배우고 연습했는데 감사보다는 불평이나 서운함이 앞서고, 이 아이는 저절로 잘하고 있구나!
차에서 내려 안아주며 격려해 주고 싶었지만 눈물을 보여 아이에게 부담을 줄까봐 그만둔다. 아들은 부대를 향해 걸어가는데 점점 내 마음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출산일이 가깝도록 몸무게가 3kg밖에 늘지 않았다. 건강한 아이를 낳기 힘들겠다는 의사의 말에 하루하루 눈물바다를 이루며 간절히 기도했다. 출산예정일을 훨씬 지나 어렵게 아이를 낳고 정신을 차린 후 가장 먼저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이 괜찮아요?’ 였다. 아이가 건강하다는 대답에 나는 바로 그 아이 이름을 ‘감사’라고 부르겠다고 말했다. 그 때는 정말 아무 것도 필요없었다. 아이가 괜찮으면 그만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확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진리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나의 감사는 딱 한 달 뿐이었다. 감사라고 부르던 이름 대신 호적에 올린 이름이 지어질 때까지.
아들은 성장하며 형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말문이 트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영역의 인지발달이 느려 내 가슴에 큰 돌덩이를 하나씩 쌓아가고 있었다. 아이의 나이에 비례해서 내 고통의 깊이는 커져가고 기도는 차츰 탄식으로 얼룩져갔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사실은 아이와 나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는 것이었다. 연약한 아이에게 힘이 되고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기에 나는 너무 나약하고 두려움이 많은 겁쟁이였다.
고등학생이 된 아들은 조금씩 자신감을 얻으며 성장의 속도 역시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가슴앓이는 이제 조바심으로 바뀌어 아이를 들볶기 시작했다. 그동안 숨겨둔 기대감을 요구하며 사춘기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워주었다. 아들과의 관계는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도록 몰고 갔다.
그러나 아들은 엄마의 성화를 잘 견뎌내며 자기의 길을 묵묵히 걸어와서 이제 의젓한 군인이 되어 있다. 돌아보면 무엇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왜 그렇게 기다려주지 못했는지 미안한 마음에 부끄럽기도 하다. 지난날 수많은 위기 속에서 건져내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도 이토록 새까맣게 잊어버리다니! 내게 있어서 감사란, 그분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저 아이의 성장사에 빼곡히 적혀 있는 하나님을 기억하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제 내가 할 일은 저 아이를 위해 기도하며 기다려 주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려 주신 것을 잊지 않는다면 충분히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저 아이를 키우셨군요! 감사합니다. 아버지. 저는 제가 키워야하는 줄 알고 안달복달했어요. 이제 기도하며 기다릴게요. 제가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않게 해주시고 계속 기다림을 연습하게 도와주세요.’
강인진 (함께하는교회)

<공로상>

동안성결교회 ‘감사 릴레이’

어느 날, 페이스북을 통해 ‘감사 릴레이’ 바톤이 제게 와서 참여한 후,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서 감사 릴레이를 시작했습니다. 저의 감사를 고백하고 다음 사람에게 감사 바톤을 넘기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감사운동이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여 조용하던 교회 홈페이지에 방문객 수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감사 릴레이는 52명을 이어가고 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 가족들에 대한 감사, 교회 생활에 대한 감사, 담임목사에 대한 감사 등 대부분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드리는 감사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매주 교회 주보에 이 감사 내용을 실었더니 감사의 감동이 확대재생산 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이 교도소 안의 형제들에게도 전해져, 그분들이 감사 운동에 동참하게도 되었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주일로 이어져,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내용이 더욱 진해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아기를 유산한 젊은 부부가 드리는 감사,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다가 행복한 신앙생활을 회복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 남편을 잃고 시름에 잠겨 있다가 교회생활을 회복하면서 삶의 용기를 되찾은 여인의 감사도 담겨 있었습니다. 개인의 감사를 나누면서 서로 은혜를 받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감사편지를 차곡차곡 곡간에 모으듯 모아두었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어렵고 힘들었을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들, 그리고 편지들을 읽으면서 더욱 감사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우리 동안교회를 감사가 더욱 넘치는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담임목사 박상진)

<버금상>

“믿음 + 감사 = 행복”

(전략)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도 내겐 감사가 없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려니 두려웠고, 그래서 겉으로는 ‘삼척’으로 살았다. 믿음 있는 척, 감사한 척, 은혜받은 척. 나는 이 ‘삼척병’으로 생활을 위장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설교를 들을 때에도, 복음성가를 부를 때에도.
하지만 속으로 내 마음은 튀었다. 따지기가 주특기인 나는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다.
‘감사하라구요? 개뿔, 감사할 조건을 주셔야 감사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 생각해 보세요. 남들이 누리는 평범한 축복이 내겐 없잖아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잖아요. 남편이 있길 하나요? 딸이 있길 하나요? 돈은 또 어떻구요? 방세 낼 날이 가까우면 두려운 걸요. 건강이 좋길 하나, 인물이 이쁘길 하나, 하나뿐인 아들이 고분고분 말을 잘 듣길 하나요? 청개구리처럼 엇길로만 가는 데도 감사하라구요?’
그것은 절규에 가까운 항변이었고, 일방통행에 가까운 악다구니였다. 나의 악다구니는 허공을 치고 돌아오는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그런데 남에게 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내 근성 때문에, 성경 읽기에 매달렸다.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아서 읽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성경 다독상을 타기 위해서였다. 시장 노점에서 채소를 팔면서도 내 손에선 성경이 떠나지 않았다.
“배추 한단 얼마예요?”
“삼천원입니다. 감사합니다.”
건성으로 말해 놓고 또다시 성경을 읽어 1년에 열 번 완독하여 다독상을 받았다. 성경퀴즈 1등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교회학교 교사로도 봉사했다. 내가 가르친 학생이 목사나 전도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기뻤다. 그리고 남들이 가기를 꺼리는 정신병원에서 시(詩)치료를 8년 동안 봉사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사랑과 감사가 없었다.
그러던 10년 전 어느 날, 새벽기도를 다녀온 후 우연히 성경을 폈는데, ‘하박국’서였다. 평소 ‘호박국’이라 농담삼아 말했는데,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장 17절~18절)

눈물이 쏟아졌다. 감사 없는 믿음 생활은 속빈 강정이었다. 알맹이 없는, 무늬만 화려한 소라껍질이었다. 그 이후 나는 감사의 조건을 찾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의외로 크고 많았다. 무심코 너무 커서 간과한 것들이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햇빛과 단비, 바람을 주셨고, 신선한 공기를 주심도 너무 감사했다. 어디 그뿐이랴. 숨 쉴 수 있는 산소를 주심도, 물도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으랴. 감사의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니, 인물이 무허가 판자촌처럼 제멋대로 생겼는데, 심성 고운 권사로 할머니로 인정해 줌을 알겠다.
인슐린 투여를 날마다 해도 지금까지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니 감사하고, 눈이 나빠도 말씀을 보게 하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홀로 키운 아들은 어느덧 마흔다섯 살의 나이테를 감았다. 예쁜 며느리와 손자 둘, 손녀 딸 하나를 주셨다. 효심 깊은 아들 며느리라고 남들의 칭찬이 자자하다. 6년 전 어머니 혼자 계시다 고독사(孤獨死)같은 사고라도 생기면 가슴에 한이 된다며 합가를 권했다. 많은 생각 끝에 합가했다.
내 나이 어느덧 일흔하고도 둘이 되었다. 인생의 황혼을 맞았다. 일출도 아름답지만 일몰 또한 숨 막히도록 아름답지 아니한가? 나는 이제 행복을 만끽하며 살려 한다. 남들은 내게 묻는다. 어쩜 그리도 날마다 웃으며 행복하게 사느냐고.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죠.”
여기에 한 마디 더 보탠다.
‘믿음 플러스 감사는 행복’이라고.
홍정이 (강릉성결교회)

<버금상>

“엄마,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엄마….
태어나서 지금까지 30년 넘게 불러왔던 이름인데, 새삼 더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엄마….
늘 그렇게 부르기만 해왔던 이름인데. 이젠 나도 어느덧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습니다. 이 정도면 나도 참 괜찮은 딸이라 자부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쇼핑도 영화관람도 가끔씩 엄마와 함께하며 엄마가 외롭지 않게 친구가 되어주고 있으니 이만하면 사려 깊은 착한 딸이라 생각했었지요. 해마다 어버이날, 엄마 생일날이 되면 편지 한통으로 엄마에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엄마에게 혼이 나도 엄마 속상할까 그 마음 헤아려 금세 아무렇지 않게 엄마를 향해 웃어주기도 하고,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엄마 형편 먼저 알아 사달라고 졸라본 적 한 번 없으니 이 정도면 참 철이 일찍 든 편이라 생각했었던 철없는 딸이었죠.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감사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들, 엄마 사랑의 무게에 비하면 너무 가볍게 해왔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엄마를 잘 안다는, 이해한다는 철없는 생각이 부끄러워집니다.
이제 7개월 남짓 된 딸 윤하를 키우며 하루에 수도 없이 엄마가 떠오릅니다. 밤에 자다 깨서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며, 밤에 잠투정이 심해 비가 오는 날에도 자정이 넘도록 밖에서 나를 업고 다녔다는 엄마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내게 와 닿습니다. 이유식 한 스푼에 활짝 웃는 내 딸 미소에 내가 더 행복해지는 걸 보며, 밖에서 생긴 간식 하나 엄마 혼자 마음껏 먹지 못하고 나와 동생을 떠올렸을 엄마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인 줄만 알았습니다. 엄마는 원래 부지런한 사람이라 새벽부터 일어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우리 남매 학교 보내고, 청소까지 마친 뒤에야 출근하시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입이 짧아 좋아하는 음식도 별로 없고, 그저 우리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우리 엄마니까 그 모든 게 그저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나를 낳을 때, 엄마도 22살의 청춘이었고, 여자였다는 걸 나는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엄마도 나처럼 곱게 화장을 하고 한껏 멋도 부려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는 걸 나는 이제야 그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 심한 감기 몸살로 앓아누워 있다는 엄마 소식에 죽이라도 사들고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내가 아니면 먹지도, 놀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딸아이를 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내 딸이 아플 땐 밤을 지새워 물수건으로 온 몸을 닦아주었는데, 하루 12시간씩 일하시느라 허리 무릎 팔 안 아픈 곳이 없다는 엄마를 언제 한 번 시원하게 주물러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제와 뒤늦은 후회와 깨달음이 뜨거운 눈물이 되어 못난 딸의 볼을 적십니다.

이제는 나도 그렇게 엄마의 딸에서 내 딸아이의 엄마가 되어가고 있나 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엄마 생일날 작은 립스틱을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생 손을 잡고 20분 남짓 걸어간 화장품 가게에서 우리 엄마는 커피색을 좋아한다고 또박 또박 엄마의 취향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기뻐할 거란 생각에 너무 신이 나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었죠. 엄마는 너무 고맙다며 한참동안 동생과 나의 볼을 그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엄마 취향에 꼭 맞는 선물이 엄마를 기쁘게 했던 게 아니라, 엄마를 기쁘게 하려 했던 나와 동생의 마음이 엄마의 눈시울을 적실만큼 엄마를 행복하게 한다는 걸, 나는 이제야 진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 결혼을 하고, 또 지금의 나처럼 한 아이의 엄마가 될 때까지, 그래서 지금보다 조금은 더 깊이 엄마를 이해하게 될 때까지,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주세요. 그땐 더 진실한 엄마의 친구가 되어 함께 추억을 이야기하며 밤새 도란도란 풍성한 이야기꽃을 피우게 될 테지요. 주고 또 주고도 더 주고 싶은 엄마 마음을 다 이해하기엔 아직도 부족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엄마가 된 것이 그래도 감사합니다.
사랑한다는, 존경한다는 세상에 많고 많은 그 흔한 말들로는 이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내 엄마니까, 나를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 흔한 한 마디 만으로도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 믿습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 엄마가 된 큰 딸 미나 올림
이미나(청량교회)

<장려상>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한 100가지 감사

아버지를 향한 감사
ㆍ어린 시절 6년 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일이 슬픈 일인 줄 알았는데 자연을 벗 삼아 자라면서 풍부한 감성과 인성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ㆍ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ㆍ엄하게 교육시켜주셔서 버릇없다는 소리 듣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ㆍ교회 다니는 사람은 더욱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해주셔서 바르게 살려고 애쓰며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ㆍ‘신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고 말씀해주셔서 몸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ㆍ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친구를 잘 삼가서 사귀어야 한다고 조언해 주셔서 좋은 친구들 많이 만날 수 있어 감사합니다.
ㆍ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쳐주시고 신용을 중히 여기라는 말씀으로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ㆍ이웃의 경조사에 꼭 참여하셔서 관계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ㆍ자식들에게 부끄러운 행동으로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곧은 성품과 품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를 향한 감사
ㆍ초등학교 때 겨울이면 엄마가 대나무 뜨개바늘로 짜주신 505털실 색동 스웨터 입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ㆍ막내 삼촌까지 데리고 13평 아파트에서 7식구가 살아갈 때 도시락 5개씩 싸시면서도 한 번도 소홀한 적 없이 엄마의 사랑 가득한 도시락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ㆍ새벽녘 아버지와 함께 두런두런 자식 걱정, 학비 걱정하시며 아버지와 지혜를 모아 삶의 난관을 헤쳐나가신 것 감사합니다.
ㆍ엄하신 아버지를 대신해 자식들의 소통의 통로 되어주신 것 감사합니다.
ㆍ자식은 속으로 사랑하는 거라면서 표시내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ㆍ잠잠히 성실히 어른 공경하는 법, 삶으로 보여주셔서 그 모습 닮아 살아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ㆍ친구처럼 제 이야기 들어주시고 엄마 속마음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ㆍ언젠가 약속하신 말씀 ‘죽기 전에 예수님 믿겠다’고 하신 것 너무 늦기 전에 지켜주실 줄 믿고 감사합니다.
ㆍ뵙고 싶을 때 뵐 수 있고 ‘사랑합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도록 저희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수옥(강서교회) 

<교정마을 으뜸상>

박추수 교도관님, 어디 계십니까?

지금은 정년퇴임을 하시고 교도관의 직무에서 떠나 계실 것으로 생각되는 교도관 계장님을 잊지 못합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뼈에 사무치도록 커다란 은혜를 입고도 단 한 번도 올바른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도 못한 채, 제주교도소를 떠나 육지교도소로 이송 온 이후,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숙제를 안고 수용생활을 했습니다.
30여 년 전인 1982년 목포교도소에서, 계장님은 이제 막 부임해 오신 교도담당이셨고, 저는 좀도둑으로 교도소에 첫 발을 디딘 소년 수용자였는데, 그때 받은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 생략)
구속될 당시 8개월 만삭이던 아내 걱정에 계장님의 어떤 이야기도 가슴에 와 닿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분명히 이번에는 장기형을 받을 것인데, 그 어떤 말인들 제 귀에 들어왔겠습니까? 그러면서 해가 넘어가고 설날을 코앞에 둔 추운 2007년 2월 5일, 느닷없이 아내가 면회를 왔습니다. 분명히 며칠 전에 산통이 와서 병원으로 간다고 했는데, 면회를 왔다는 이야기에 기쁨보다는 의문이 컸습니다.
접견장으로 들어선 순간, 투명한 아크릴판 너머로 보이는 꽃무늬 강보에 쌓인 빨간 핏덩이의 갓난아기(아들로 보였는데)를 안은 사랑하는 여인이 핏기를 잃어 핼쑥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 순간 화부터 냈습니다.
“야! 너 미친 것 아니야?”
“미안해요! 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그냥 습관처럼 교도소로 가자고 해버렸어요. 미안해!”
그러면서 그녀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습니다. 아기를 낳은 지 다섯 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제 막 낳은 핏덩이를 교도소로 먼저 데려온 아내에게 저는 평상시 성격 그대로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목격한 계장님께서는 그런 저를 진정시키고 접견장의 직원에게 제 아내와 아기를 따뜻한 곳으로 안내하고는 자신이 손수 교도소의 절차에 따라서 보안과장과 소장실까지 쫓아가서 장소변경접견 허가를 받아서 저와 아내와 아기까지 우리 세 가족이 직접 만지고 아기를 보듬을 수 있도록, 그 어떤 가름막도 없는 변호사 접견실에서 면회를 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박추수 계장님!
계장님께서는 제가 불쌍해서 교화의 2007년 10월, 제주교도소에서 육지로 이감해올 때 계장님의 마지막 모습을 뵙고 헤어진 이후 계장님께서도 정년퇴임을 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느덧 많은 시간이 흘러 저는 이제 지천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내가 제일이라고 믿으며 살았던 무신론도 깨어지고 하나뿐인 나의 아들이 아빠가 없는 상태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셔서 어떤 흠도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십사, 무릎이 닳도록 새벽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중간 생략)
박추수 계장님!
인생의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구세주처럼 만난 계장님의 높으신 은혜에 다소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남은 인생을 사람답게 새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각오와 변화된 모습을 계장님께서 교정의 길에 계셨을 때 보여드리지 못한 점 용서를 바랍니다. 그래도 계장님께서 교도관의 길에서 끝까지 교화를 목표로 마지막까지 보여주셨던 따뜻한 보살핌이 있으셨기에 당신의 교도관 생활은 결코 실패가 아닌 성공이었다고 말씀을 드리며,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어느 곳에 계신지는 모르오나 강건하시고 댁내에 만복이 가득하시길 언제나, 기도할 때마다 잊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4년 10월 군산 교정마을에서, 김관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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