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저마다 ‘자기 생각은 옳고 자기의 판단과 행동은 바르고 당연하다!’고 합니다. 자기 잘못이란 아무 것도 없고 뭔가 문제가 있다면 다른 사람이 저지른 것이라고 발뺌하고 시치미를 뗍니다. 대중매체에 에워싸여 살아야 하는 오늘날, 이러한 완고한 자들의 뻔뻔스러움이 서로 부딪혀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되어 자기 본위의 주장은 더욱 기승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울함이고 비참함입니다.

이러한 행태는 인간의 됨됨이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인간 존재의 한계이고, 기나긴 삶의 역사에 박혀 있는 인간들의 ‘자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일러줍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 속에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서는 안될 관계 속에 인간이 들어 있고, 이 관계 속에서 하나님에게 의지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의 질서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이야말로 삶 자체의 출발이고 근거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자기 모습과 자기 형상도 이해되고 정의됩니다. 여기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관계도 설정되어야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나타나지도, 자신의 노력으로 창조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어쩌다가 우연하게 나타난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의 형상’으로

그러므로 이 존재는 참으로 특별합니다. 시편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그에게 명예와 보석으로 만든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사람이란 하나님 아래 있으나 왕관을 쓰게 된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는 한에서만 그러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인간이 벗어나는 순간, 이 모든 것은 깨어지고 사라집니다.

인간이 자기중심의 틀 속에 빠져들어 ‘하나님의 형상’을 저버린 그 자리에 자기를 들여놓게 된 그때부터, ‘하나님의 형상’에서 ‘사람의 형상’을 입게 되면서 모두가 오만방자하게 되었습니다. 겸허를 잃게 되면서 인간의 삶은 살벌해지고, 존재 자체가 초라하고 야비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쳐 나와 자기 본위의 편벽된 삶의 지평 안에 갇혀버리게 되면서 이 관계의 지평에는 자기 본위의 사람들만 득실거릴 뿐입니다.

 

‘삶의 비극’ 저편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난 그때에 시작된 삶의 비극입니다.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고, 어떤 모습과 형상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삶의 깊은 관심 같은 것은 모두 내동댕이쳤습니다. 창조주의 뜻을 배반한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인양 거드름 피우며 행세하게 된 오늘날, 자기 ‘변화’라는 것은 필요한 것도, 가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이익의 추구가 최상의 관심 대상이 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관심의 세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존재 그 너머 ‘존재의 존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오늘의 인간처럼 시시해지고 천박했던 때가 역사의 어느 시기에 있었을까 하고 되묻게 되는 삶의 상황에 우리가 들어서 있습니다.

자기중심의 지평 안에 갇혀 사는 인간에게는 그러한 자기 본위의 지평 그 자체를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계기를 인간 스스로 쫓아내어 변화 자체의 여지를 없애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 인간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곧 ‘삶의 변화’

기독교는 삶의 변화를 강조하고 삶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변화가 없는 자기 고착 상태를 기독교는 허락지 않습니다. 모두들 자기가 옳다고 믿고 자기라는 존재를 높이 떠받들고 살아가는 저 ‘작은 우상들’이 휩쓸고 있는 이 삶의 정황에서, 기독교는 그 우상들을 타파하라며 일대 삶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변화’라는 말의 뜻이 기껏 자기 이익의 확장을 위한 도구의 수준에서 이해되고 있는 이 비속한 시대에 기독교는 모든 것을 근본에서 바꿔야 한다고 외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의지하며 살도록 지음 받았다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깊은 수준에서 자기 변화를 실행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의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 안에서 하나님에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심에 따라 삽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한계투성이인 자신의 변화를 전제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변화하고, 또 변화를 일굽니다.

 

‘나’의 모습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 집착’을 어찌하지 못하여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변화’를 목말라 하고 있습니까? 자기 본위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습니까, 거기서 뛰쳐나와 ‘자기 변화’를 일구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의 형상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입니까, ‘사람의 형상’입니까?

 

박영신

사회학자. 평생 연세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명예교수이다. 10여 년 동안 녹색연합 상임대표를 지냈고, 요즈음은 ‘탈핵운동’을 진지하게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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