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정신장애인 선교하는 현귀섭 목사

텔레비전 의 한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이경규 씨가 공황장애를 겪었노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소위 ‘장애’를 나와는 상관없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들여다보면 나와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크고 작은 장애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정신장애다. 사람들은 ‘장애’라는 단어에 왠지 낯설음을 느끼지만, 우리가 요즘 자주 듣는 우울증, 조울증, 공황장애 등이 이 정신장애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이는 많지 않다.
사실 자신이 정신장애를 겪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같은 병으로 고통당하며 홀로 방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커밍아웃을 불사하고 그들을 돕는데 두 손 걷고 사는 이가 있다. 바로 현귀섭 목사(대민침례교회)다.

▲ 정신장애를 겪고 있지만, 그것을 숨기지 않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고통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앞장서는 현귀섭 목사.

고독 속에 만난 하나님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6년동안 천재란 소릴 들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현 목사. 하지만 시골에서 공부한 것으로 서울의 학생들과 겨룬 결과는 보기좋게 낙방이었다. 그렇게 중학교 입시에 낙방하고부터 방에서 책만 봤다. 한밤중에도 호롱불을 켜놓고 소설을 읽었다. 그날도 여전히 현 목사는 방에서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읽고 있던 소설 속 등장했던 유령에 대한 공포심이 일순간 확 올라왔다. 너무 무서워 가족들을 깨웠지만, 되려 아버지께 호통만 들었다.
무서워서 한숨도 자지 못한 그는 밤을 꼬박 새고 아침이 되어 방에서 나가려하는 찰나,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 날이 자신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다행히 의식이 돌아왔으나 그때부터 현 목사는 이상한 말을 늘어놓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그의 병명은 조울증.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든 때라 정신적인 질환은 모두 다 ‘미친사람’ 취급하던 시대였다. 그 역시 미친놈 소릴 들어야 했다. 양방 ․ 한방 다 돌아다녀도 의사들은 원인을 찾지 못했다. 침도 맞아보고, 뜸도 들고, 무속신앙에 기대보기도 했건만, 숱한 고생 끝에도 병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휴학과 복학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병과의 외로운 싸움을 하던 중 막내 외숙모의 권유로 처음 가게 된 교회. 그 후로 신기하게 병세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전에 보이던 증세가 더 이상 나타나질 않았던 것이다.
18살에 처음 간 기도원에서 현 목사는 자신의 병이 사람들이 말하던 귀신들린게 아닌,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느꼈다. 그 곳에서 삶의 이유를 깨닫고, 목회자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군 제대 후 28살, 느즈막에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입학 후 또 다시 병이 재발해 휴학할 수 밖에 없었다. 쉴새없이 이어지는 휴학에 그야말로 절망스러웠다. 남들은 다 졸업해 자기 길을 찾아가는데, 전진하려 하면 또 다시 후퇴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휴학 후 간절히 기도했다. 감사하게도 1학년 2학기 복학 후 현 목사는 졸업까지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며 휴학없이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신학교를 다니고,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마련하기까지 근 10년을 병원 근처에도 가 본적이 없다. 현 목사는 그 때 당시를 “그저 은혜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고 했다.
“조울증 자체는 완치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정신병 자체가 완치가 어려운 병이니까요. 하지만 불치병이 아닙니다. 지금은 현대의학이 발달해 평소에 관리만 잘하면 일반인과 똑같이 생활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플 때는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라 ‘정신과’분야의 병원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만약 다시 재발했다면 지금의 아내도 만나지 못했을 테죠.”

이유있는 고통

하지만 병은 현 목사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1988년 올림픽이 개최되던 해, 다시 병이 재발한 것이다. 이미 교회를 개척해 목사로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할수없이 대구정신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그 당시 기도원도 다녀보고 현 목사가 할 수 있는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증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목사까지 만들어놓고 병을 고쳐주시질 않는지 하나님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교회를 비우고 무작정 병원에만 있을 수 없어 퇴원했지만 교회 안은 이미 그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교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현 목사는 절망과 괴로움에 휩싸여 더 이상 살아갈 의지를 찾지 못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지옥을 가더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사실 목회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명예가 달린 문제다. 그 때 현 목사 가슴 한 켠에는 큰 멍이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믿고 격려하며 함께 해 준 교인들과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귀한 인연들이 있기에 그는 포기할 수 없었노라고 고백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결코 짧지 않은 그 고난의 시간속에 현 목사는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의 고통은 이유있는 고통이었다는 것.
정신장애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모를 것이리라. 그때부터 주변의 정신질환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처럼 정신질환으로 고통 당하는 이들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현 목사는 본격적으로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사실 39살이 될 때까지 하나님 능력으로 고침받겠단 생각에 약물복용을 하지 않았던 현 목사다.
그때부터 현 목사의 삶에 소망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57세인 그는 여전히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감사할 뿐이라고 고백했다.

▲ 다은스쿨에서는 한 주에 2번 채플(학교예배)이 있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 때문

그의 우여곡절 많은 지난 삶이 지금의 사역을 있게 했다. 7년 전 정신장애인을 위한 선교회를 한국에 처음 만들고 정신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한 대안학교 ‘다은스쿨’과 직업재활센터 ‘행복한 일터 보호작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일반 대안학교가 공교육을 보완하는 것이라면 ‘다은스쿨’은 조금 다르다. 아니 완전 다르다.
정신장애 때문에 직업을 얻지 못해 자립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인정하고 화해하는 것 조차 이뤄지지 못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과의 화해다. ‘다은스쿨’은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며 정신질환 때문에 겪어던 상처를 회복하는 것이 첫 번째요, 그 다음이 경제적 자립을 위한 직업훈련이다.
약 50여명의 회원이 있는(이 곳에선 학생 대신 회원이라고 칭한다) 스쿨은 심리치료 수업 외에도 다양한 예체능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대부분의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치료받는 이들의 생활이 혼자만의 싸움이라면, 이 곳의 생활은 ‘함께’하는 분투다.
정신장애 3급을 앓고 있는 그는 지난 2011년 대통령이 수여하는 ‘올해의 장애인상’을 받기도 해 이제 대구에선 꽤 유명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유명세가 사역에는 그리 큰 도움을 주진 못하는 듯 했다. 정신장애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 때문이었다.
우울증, 조울증, 정신 분열 등 다양하고 복잡한 정신장애는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겪고 있지만, 사회적 체면 때문에 혹은 불이익을 당할까봐 자신의 병을 숨기거나 가족의 병을 숨기는 실정이다.
오히려 이런 사회풍토가 정신장애인을 양성하는 셈이다. 현 목사는 인식의 개선이 제일 먼저라고 했다. 그리고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가족들이 적극적으로 환자의 치료를 위해 나서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 정신질환은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병이다. 그는 우리 주변의 정신장애인들을 만든 건 바로 ‘우리’라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병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으리라 여겨지는 그의 일상은 홀로가 아닌, 이웃과 함께였다. 가난한 영혼을 향한 그의 뜨거운 마음에 34도를 넘나드는 후덥지근한 대구날씨가 무색하게 느껴졌다.


박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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