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스 린튼 선교사는 1954년 한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에 전쟁이 나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남편이 어려운 한국의 현실을 보고 이 곳에 선교사로 와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마리엘라 선교사님과 인터뷰가 끝나고 한가하게 쉬고 계시는 루이스 린튼 여사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 통화를 하는 단짝인 두 분은 같은 단지에 살고 있어서 무엇을 하든 함께 움직이셨다. 원래 린튼여사의 집은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전망 좋고 큰 아주 좋은 집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 나와 있을 때 갑자기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다. 그래서 귀한 자료들이 모두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는 것에 아쉬워 하셨다.
지금은 혼자 아파트에서 살고 계신다. 루이스 린튼여사는 사랑스럽고 친절하고 아름다운 분이였다. 누구든 그 분을 만난다면 늘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먼저 사랑해 주려는 친절한 성품과 모습을 보고 위로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삶은 참 그리스도를 닮아 있었다. 우리에게 자신을 ‘베티’라고 소개하는 루이스 린튼 선교사님을 우리는 그 곳에서 ‘베티 린튼’으로 불렀다. 한국에서는 ‘인애자’란 이름으로 유명하신 분이셨다.
그녀와 인터뷰를 하기 전에 그녀가 결혼한 집안인 린튼가와 유진 벨에 대해 소개한다.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 유진벨 선교사

유진벨(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 1868~1925)은 한국에 온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였다. 1894년 4월 18일 루이빌 노회에서 목사로 임직을 받고 바로 결혼해서 1895년 4월 5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어학 훈련을 받고 1897년부터 전라도 사역을 시작해 목포 선교부와 광주 선교부를 개설한 전라남도 선교의 개척자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두 명의 아내와 한 명의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고, 1925년 9월 결국 그 역시 한국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한국에서 27여 년의 시간이 그의 사역 전부였다. 교회를 개척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전도하고, 학교를 세우고, 성서를 번역하는 일 등 다양한 사역을 했다. 그를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전라도 지역에서 수많은 일과 선교 사역의 기틀을 잡는데 일조했다.
호남신학대학교 동산에 가면 유진 벨 선교사와 그의 첫 번째 부인, 두 번째 부인의 묘소가 있다. 유진 벨은 당시 이 백성을 보면서 복음 외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편지를 쓸 정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선교를 했다.
그의 큰딸 샬롯 벨(한국명 인사래)은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 한국명 인돈, 1891~1960)과 결혼해 한국 기독교 교육 선교에 투신하여 전주, 대전, 광주 등에서 활동, 그들의 자녀들과 손자들 역시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했다.
1995년 4월 4일 유진 벨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지 100년 되던 날 유진 벨 선교사의 후손들은 유진 벨 100주년 기념 재단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북한에 식량 지원과 의료 지원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오늘 인터뷰하는 루이스 린튼 여사(한국명 인애자)의 시어머니가 바로 유진 벨 선교사의 딸인 살롯 벨이고 시아버지는 윌리엄 린튼이다. 루이스는 그들의 아들인 휴 린튼(Hugh M. Linton, 한국명 인휴, 1926~1984)과 결혼해서 한국으로 와 순천에서 사역을 하였다. 남편 휴 린튼 선교사는 한국에서 자라,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그 때 루이스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 전쟁의 참상에 선교의 마음 품어

그녀는 한국말을 곧 잘 했다. 원래 한국말을 잘 했는데 은퇴하고 미국에 들어 와서 한국말을 쓰지 않다보니 이제는 거의 다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래도 의사소통을 하는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80세가 넘은 연세에도 쾌활하고 상냥한 성격 탓인지 나이가 든 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무릎이 안 좋아 지팡이를 사용하고,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사용할 뿐 전체적으로 건강해보였다.
루이스 린튼 여사는 1927년생으로 28세가 되던 1954년 한국에 오게 되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같은 대학에 다녔던 휴 린튼과 대학 졸업 후 5일 만에 결혼했다. 원래는 남편의 친한 친구가 브라질 사람이라 브라질에 선교사로 가려고 했으나 선교의 길이 막혀 버렸다. 대신 한국에 전쟁이 나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남편이 어려운 한국의 현실을 보고 이 곳에 선교사로 와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그래서 1954년, 부부는 한국에 오게 된다. 그녀의 시부모님은 대전에 있는 지금의 한남대를 세우는 사역중이라 그녀 부부는 몇 주를 대전에서 지내다 순천으로 가서 사역을 시작했다.
1954년 4월 1일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벌써 미국에서 3명의 아이를 낳은 상태였고 순천에서 나머지 3명의 아이를 출산하였다. 여섯 아이들의 엄마로, 선교사의 아내로 그녀는 그렇게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한병선
‘한병선영상만들기’ 대표로 한국의 3세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는 사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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