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사절단

1967년 광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원래 광주는 남장로회가 사역하던 곳인데 북장로회 출신인 존과 진 언더우드는 호남신학교인 이곳에서 남편은 신학을, 진은 기독교교육과 음악을 가르쳤고 93년 은퇴했다. 40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그녀의 40년 한국 역사 속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80년 광주사태다. 영문도 모르게 죽어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역사적 혼란과 함께 인권유린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때의 상황을 책으로 만들었다.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역사를 그녀는 갖고 있었다. 그곳에 있었던 그녀의 부부와 선교사들은 화해의 사절단으로 군과 시민들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하였으나 불행히도 성사되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시간을 그녀 부부는 함께 한 것이다.

이제 우리를 생각해 보자.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전쟁직후 일본의 속국이었던 한국이란 나라와 내가 준비하고 가고자 마음먹었던 필리핀이란 나라. 둘 중 어디를 선택할 것인가? 내가 여태까지 준비했던 것을 버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갈 용기가 있는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희생

두 번째는 그녀의 아이들이다. 그녀의 남편 존 언더우드 역시 할아버지가 선교하러 온 나라를 떠나지 않고 그 나라를 위해 해외에 한국의 어려운 현실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평생 한국을 위해 한국에서 살았다. 그녀의 두 자녀와 손녀딸 역시 한국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큰 희생이 무얼까’생각해 봤다. 나에게 가장 큰 희생은 뭘까? 아마 내 자신이 아닌 내 자식일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자식이 희생 되는 것만큼 그보다 가슴 아픈 것은 없다.

아이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주지 못하는 부모는 평생 죄인으로 산다. 그것을 알고도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자신보다 더 큰 희생을 한 것이다. 이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 온 선교사들이 존경스러운 이유는 그것이다.

자신의 어려움은 감수 할 수 있지만 자식을 이곳에서 키우면서 그들까지도 한국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내가 원하는 것 보다 나를 원하는 곳에서 부족함을 감수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것. 그것이 내 사명이라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나도 누군가의 희망이 되려면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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