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신여기지 마라

사람들은 참 외롭습니다.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집에서 스마트폰을 붙들고 누군가와 접속을 시도하거나, 텔레비전 드라마나 오락을 보는 이들을 봅니다. 어느 분은 이 시대를 연결 과잉의 시대라 했습니다. 하지만 스산한 마음은 여전합니다. 진정한 관계맺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가수 임재범의 ‘사랑 그놈’이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늘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하고/늘 혼자 추억하고 혼자 무너지고”,

“늘 혼자 외면하고 혼자 후회하고/늘 휘청거리면서 아닌 척을 하고”

“사랑이란 놈 그놈 앞에서 난 늘 빈털털이일 뿐”

가사를 듬성듬성 인용했습니다. 시크한 척 하지만 그 엄부렁한 속내가 보이는 듯합니다. 지금 우리 삶이 가난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우리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10절)

여기서 말하는‘작은 사람들’은 큰 맥락에서 보자면 사회적 약자를 이르면 말이겠지만, 마태 공동체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교회 안에 있는 미천한 교우들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남을 낮추어보거나 멸시하는 것입니다.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피가 흐릅니다. ‘업신여기다’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없이 여기다’는 말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가슴에는 존중받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업신여김을 받는 순간 우리 몸의 진액이 마르게 마련입니다.

없는 사람으로 혹은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받을 때 우리는 생명을 박탈당한 것 같은 불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에 대해 가르치면서 가장 약한 지체가 가장 소중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랑의 상호성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좋은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의 자리, 특히 소외된 삶을 사는 이들의 자리에 다가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에 대해 말하면서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라’(롬12:16)라고 말합니다. 그 앞에서는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어느 순간 제 마음에 들어온 깨달음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가장 귀한 행복을 지금 고통받는 이들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그들 곁에 다가서고, 그들의 손을 잡고, 그들과 함께 울고, 그들의 짐을 나눠지려 할 때 그 행복은 슬며시 우리를 찾아옵니다.

 

 

 

사랑의 순례자로 산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공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포옹은 서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표시입니다. 포옹은 내가 다른 사람을 안는 행동인 동시에 내가 타인에게 안기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길 잃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부둥켜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통해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고통을 얼싸안는 마음, 그 사랑의 마음 하나 얻으라고 주님은 우리를 산 자의 땅에 머물게 해주십니다.

무정한 세상, 난폭한 세상에서 사랑의 순례자로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의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고,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사랑을 쏟아 부어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치고 낙심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는 어떤 행동도 무의미한 것, 무가치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씨를 뿌릴 뿐입니다.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눈을 흘기지 마십시오. 비난의 돌팔매질을 하지도 마십시오.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돌보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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