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용의 DID로 신앙하기


나는 청평에서 산다. 강남까지 출퇴근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해도 청평에 사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들은 특별한 시간을 내어 강과 산을 찾지만 나는 매일 편안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누린다. 50여 분의 출퇴근 시간도 최근에 시작한 영어공부를 하는 데 활용하니 마음이 더욱 즐겁다.

그런데 며칠 전 참으로 가슴 아픈 뉴스를 들었다. 청평에 있는 신청평대교에서 다섯 사람이 투신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내가 매일 평화롭게 바라보며 출퇴근하는 그 다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어하는 다섯 생명이 몸을 던진 셈이다. 그래서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연령대를 보니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인생에 대한 꿈과 도전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젊은이들이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스스로 인생을 마감하려 했을까?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을 테고, 이 세상이 그만큼 미웠을 것이란 사실이다. 아무리 해도 삶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테다. 희망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 사도 또한 이 세상을 빨리 떠나는 것과 더 머무르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다. 계속되는 핍박과 조롱,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피로가 사도인 바울일찌라도 결코 견디기 쉽지는 않았으리라. 차라리 이 세상을 빨리 떠나 자신의 희망인 그리스도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세상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 1:20~24)

이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대의 청년들이 세상과 자신에 대해 희망을 찾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참 희망이 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만났더라면, 그래서 그들이 내 상황은 당장 죽고 싶지만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형제들을 위해 더 유익하기 때문에 계속 살아가겠다고 결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세상과 나 자신만으로는 희망을 가지기 힘들다. 뿌리 깊은 욕망의 전쟁터인 세상과 그 전쟁터에서 상처받고 또 상처 주는 자신에게서 무슨 희망을 볼 수 있겠는가. 죄와 욕망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그리스도만이 희망일 뿐이다. 그러니 세상을 떠나고 싶을 때,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자. 어차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라면 조금 늦은들 무슨 상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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