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최은창의 '인생 둘레길'


“이봐요 최 교수. 나는 이곳에 올 때 내 병을 고치려고 왔고, 그래서 검사를 했으니 괜찮다면 수술해 주시오. 물론 수술에 어려운 점이 많이 있겠지만 난 꼭 수술해서 치료해야 하거든요.”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고, 돈이 좀 생겨 쓸 만할 때가 되면 놀고 싶어도 바빠서 짬이 안 난다. 이제 시간과 돈에 모두 여유가 생기면 은퇴할 때가 되어 체력이 없어 못 논다.

하지만 요즈음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시간도 여유가 있고, 경제력도 갖춘 은퇴자들이 꾸준한 건강관리와 의학의 발달로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되었다. 이들은 시간, 돈, 건강을 모두 갖춘 세대로 예전의 노인들과 달리 활발한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을 하여 새로운 사회적 계층을 형성하였는데 이른바 ‘뉴시니어세대’이다.

이들이 서비스산업 전반과 사회에 끼치는 영향도 커져, 내수시장과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의 소비활동은 세 가지 키워드로 분류되는데 젊음 향수 자아가 그것이다.

뉴시니어들은 단순히 건강한 삶을 넘어 신체적 정신적 젊음도 동시에 추구한다. 안티에이징 화장품의 매출이 늘고 20-30대를 겨냥한 의류의 50대 고객이 늘고 있다고 한다. 문화산업에서는 5, 6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콘텐츠가 새로운 시장으로 떠올라 70년대 통기타 가수들의 공연이 호황을 누린다. 뉴시니어는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에도 관심을 보여 도서 구매량과 음악회 유료관객으로 폭발적인 증가를 보인다. 뉴시니어는 거대한 소비시장일 뿐 아니라 고령인구에 대한 통념을 바꾸고 있다.


50~60대의 힘, 시장을 장악하다

이러한 변화는 진료실에서도 느껴진다. 5, 60대의 뉴시니어들만 변하지 않고, 7, 80대 시니어들도 덩달아 변하고 있다. 확실히 예전의 노인들보다 요즈음의 시니어들은 젊고 의욕적이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며 치료도 적극적으로 받는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평균수명을 넘긴 어른들에게 암수술을 권하면 “이 나이에 무슨 영화를 더 보려고 수술을 해”라고 말씀하시고 치료도 않던 분들이 많았다. 행여 자식들에게 부담이라도 줄까봐 전전긍긍했다. 게다가 수술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안 한 것보다 못하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 짐이 될까 싶어 치료 자체를 마다하는 분들도 있었다. 부모님께서 주신 몸에 칼을 댈 수 없다며 수술을 피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달라졌다. 건강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높아졌고 적극적으로 치료도 한다. 암이 발견되었더라도 수술을 받고 완치되어 70, 80대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분들이 늘어났으며, 의술이 발달하여 수술 후에도 대부분 합병증 없이 건강한 여생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80세가 넘어서도 할 수 있는 한 적극적으로 치료하려는 경향이 훨씬 커졌다. 치료진도 그 의식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할 정도이다.

얼마 전 87세 할아버지를 수술하였다. 수술 전 검사결과를 앞에 놓고 보호자인 아들딸과 진료실에 마주앉았다. 이 분은 곱게 늙으셔서 나이에 비해 훨씬 젊게 보였고 예전에 구강암으로 수술 받은 병력을 제외하고는 건강하였다. 심장 폐 간 등의 기능도 정상이었다. 뽈 안쪽의 협점막암은 10여 년 전에 치료 받고 완치되었는데 이번엔 이전 치료 부위 주변의 구강점막에서 새로운 암이 발견되어 병원에 오신 것이다. 이전에 턱뼈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도 받았으므로 입이 잘 벌어지지 않았고 암이 있는 부위가 구강 뒤편이어서 수술이 까다로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검사결과가 정상이라고 해도 87세의 할아버지를 전신마취해서 구강암을 잘라 내는 수술은 시간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전에 받은 수술과 방사선치료 때문에 합병증도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문제들을 환자의 가족들에게 설명하던 중이었다.

그때 할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봐요 최 교수. 나는 이곳에 올 때 내 병을 고치려고 왔고, 그래서 검사를 했으니 괜찮다면 수술해 주시오. 물론 수술에 어려운 점이 많이 있겠지만 난 꼭 수술해서 치료해야 하거든요.” 나는 20여 년 동안 두경부 영역에 생긴 암수술을 해왔다. 그 동안 70대 환자를 수술한 경험은 있지만 87세의 할아버지는 처음이거니와 대개 수술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 이런저런 두려움이 생겨 수술을 하려고 했다가도 움츠려들게 마련인데 이분은 내가 설명을 마치기 전에 꼭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87세 할아버지의 두 번째 암수술

나는 그 연세에 그토록 수술을 원하는 분은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 까닭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꼭 수술을 받으셔야 하는지 말씀해 달라고 하자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최 교수님, 제 한몸 살겠다고 수술을 하겠습니까? 제가 여든일곱, 세는 나이로 미수가 되었는데 무슨 영화를 더 보겠습니까? 제 몸 하나라면 저는 치료하지 않고 그냥 지내다 돌아가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돌봐야 할 아내가 있습니다. 허리가 아파 거동도 잘 못해서 제가 돌보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아내지요. 그러니 제가 반드시 수술을 받고 건강을 되찾아서 나가야 합니다. 자식들도 이제는 제 몸 건사하기도 힘든 나이가 되었으니 자식들에게도 아내를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수님, 어려우시더라도 꼭 수술을 부탁드립니다.”

어르신의 말씀에 진료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르신의 아내 사랑이 하도 지극하였으므로. 우리는 어르신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정말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젠 두 번째 암이 생겼더라도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아 건강하게 사는 것이 자식들을 위하는 길이고, 아내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신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사랑하는 굳센 의지만큼이나 별 문제 없이 수술을 받고 퇴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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