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가 없어 교회가 이리도 욕먹을까요?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의 양이 적어서 교인들의 삶이 이처럼 물질에 치우쳤을까요? 김기석 목사는 예수님의 눈으로 다시 성경을 보라고 강조합니다. 문자에 갇혀 있지 말고 문자 깊은 데로 흐르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인생을 살리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율법은 본래 좋은 것이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고,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율법은 오히려 사람을 죽이고, 얽어매고, 갈라놓는 도구로 전락했다.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 조문을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그 율법 조문을 근거로 사람을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나눴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래의 의도를 누구보다 깊이 통찰하고 계셨고,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자유롭게 풀어 설명하셨다. 그 자유로움이 율법 전문가들에게는 매우 불경하게 보였고, 예수는 율법을 도외시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가슴에 명심하고 살던 말이 하나 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성인의 말을 풀어 설명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지어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을 인용하는 것이 선비들이 해야 할 일이지만, 뭔가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은 선비답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조선 최대의 문장가라고 할 수 있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은 1792년에 정조에게 소환된다. 당시의 사대부들이 청나라에서 유입된 패관잡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들의 글쓰기가 술이부작의 원리를 어기는 것은 전적으로 연암 박지원의 영향 때문이라는 정조의 판단 때문이었다. 정조는 연암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고 고문을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도모한다. 조선판 율법주의가 자유로운 영혼을 질식시킨 셈이었다.


술이부작…조선판 율법주의의 테러

바울 사도는 일찍이 이런 사실을 간파하여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라고 말했다. 문자에 얽매이는 이들은 문자의 이면을 살피지 못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신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으로는 이 계명을 옳게 지켰다고 볼 수 없으며, 자기 형제자매에게 성내는 사람, 그들을 보고 얼간이 혹은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잠재적인 살인자들이라고 해석하셨다. 그러니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자비심을 기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치유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서 사람들이 온전한 생명을 누리며 살도록 도우라는 속뜻을 헤아리고 계셨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납득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말씀이다. 그렇다고 하여 괄호를 칠 수도 없고, 지워버릴 수도 없다. 이것은 애당초에 불가능한 요구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런 요구가 전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곳에서 금방 풀려나리라는 헛된 기대를 갖지 말라고 말하면서, 눈물과 탄식과 원망 속에서 살지 말고 그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권했다.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렘 29:5-6)

아무리 눈물겹더라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치 않는 땅이라 해도 그곳에서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렘 29:7)

 

원수를 살리고 내가 살다

이건 정말 포로민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권고였을 것이다.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니.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라니. 민족주의적 감정을 건드리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살 길은 그것뿐임을 알고 있었다. 너를 살리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그것은 생태계의 신비가 보여주는 진실이기도 하다. 다른 이들을 잠재적 적으로 여기는 한 평화는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반감을 지닌 사람,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속에 있는 선의 씨앗에 눈길을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가르지 않으셨다. 예수님에게는 남이 없다. 인류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다. 예수님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다.”

우리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올 때라야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고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몸이 되는 것이거늘 너무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객관화시켜 놓았다. 주님은 지금 우리와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실 꿈을 꾸고 계신데, 우리는 주님을 ‘저곳’에 모셔놓고 자꾸 경배만 하고 있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님의 손으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믿음이다.

김기석 목사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