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게로 가오리이까? 
성경 요한복음 6:66-71
찬송 80장(통 101장)

 

예수께서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길게 말씀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의 교훈에 실망했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자신들의 요구와 아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했을 때는 어찌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할까 의아해했습니다. 그것은 구약 레위기의 말씀을 어기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17:10). 그들은 성만찬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큰 위험에 빠집니다. 성경 말씀은 해석하기에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갖기 위해 성경 말씀을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그 구절에만 사로잡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맹목적인 외고집만을 낳습니다.

그 당시 무리들은 예수의 교훈을 듣고는 “이 말씀은 어렵도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줄 때에는 예수를 따르려 했지만, 길이 험하고 곤란한 일이 닥칠 때에는 떠나 버린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무 슬펐을 것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을 훈련시켰는데 그 수고도 헛되게 그들이 예수를 떠난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애제자인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의 떡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듣고 올바르게 깨달은 첫 열매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마 16:16)과, 예수의 말씀이 영생의 양식임을 믿는 믿음과, 그가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막 14:29). 이것은 베드로의 확고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 최고의 사랑을 고백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사랑의 고백을 받고 다른 어디로 가겠습니까? 예수밖에는 다른 데로 갈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머물다가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 곁에 머물러 주님의 자랑스러운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생의 말씀에 생명을 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모시고 삽시다. 이 예수를 세상에 전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은 가능성이 있는가?
성경 시편 8:3-9
찬송 257장(통 189장)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일은 예배입니다. 예배만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고, 높이고, 찬양하고, 송축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들로서 하나님은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찾아주셔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만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의 영광,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삽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삽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위대하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그 이후로 태어나는 사람은 악하게 태어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고, 얼마만큼 죄가 심각한 문제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죄는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외칠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망하고 죽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힘으로는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수양을 쌓는 것으로도,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도 안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아무 죄도 없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죄의 값을 다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뒤에 오직 예수 앞에 나와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서 예수를 주로 영접해야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예수를 영접함으로 모든 죄의 문제를 다 해결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굶주림
성경 요한복음 6:22-35
찬송 463장(통 518장)

 

예수께서 지난날 물위를 걸으셨고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오신 것을 알지 못하는 무리들은 예수를 찾아 헤매다가 가버나움에 와서야 겨우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찾으러 다닌 열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열심은 당연히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무리들은 예수를 찾은 이유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열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보고 그들의 육신의 허기를 메우려는 벅찬 기대감으로 충만해 있었고, 이런 무리들의 속셈을 예수께서는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의 썩어질 양식을 구하려고 분주합니다.

썩을 양식은 세상적인 것입니다. 물질이고, 권력이고, 명예입니다. 우리는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이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 사용하신 그 많은 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 자신이 영원한 양식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그 무엇보다 용서하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과 우리는 화해하여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봉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순결해야 합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성별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깨끗하게 성결하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도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실패든, 가난이든, 질병이든, 죽음이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아서 결과가 좋지 못한 것으로 보여 순종하기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썩어질 돈,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그분을 만나 그분으로 만족하고 그의 일을 하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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