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원로목사가 부르는 임종의 노래

나는 너무 행복해. 내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나는 한줌의 핏덩이였어. 그런데 내 인생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들을 세어보면 얼마나 감사한 것들뿐인지 몰라. 사람은 살면 살수록 더러워져.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옷으로 바꿔 입는 것, 이게 구원이야.


“목사님이 많이 안 좋으셔. 자네에게 연락하라고 하시니 시간이 되면 한번 와보게나.”
며칠 전 마음 터놓고 지내던 한 목사님의 사모님이 전화를 하셨다. 목사님은 늘 당당하고 깔끔하게 사셨다. 은퇴 후에는 시골의 맛난 음식점으로 지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였다. 목회할 때 교단과 지역교회들을 돌보느라 소홀했던 이들에게 그렇게 마음을 내주었던 게다.

전화를 받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늦은 오후였으나 두 시간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갔다. 예사롭지 않은 느낌에 오래 된 기억들이 떠올랐다. 교단을 섬기는 자리에서 당신은 든든한 어른이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일이 어지러울 때는 추상같이 호령하여 길을 내는 지도자였다.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마쳤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일흔일곱이면 청년처럼 살기도 하는 세월인데, 목사님은 굳이 영양제 주사도 거부한 채 주님 부르실 시간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 맑은 얼굴이 경외스럽기까지 했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자녀들이 모두 귀국하여 곁에 있는 것만 보아도 목사님의 건강상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거 한번 읽어 볼 텐가?”

목사님은 두 장의 글을 내미셨다. 한 장은 “본향 가는 순례자”(임종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은 글이었고, 다른 한 장은 목사님의 이력이 정리된 쪽지였다. 임종의 노래는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온 한 영혼이 임종을 준비하는 마음을 담은 글이라 경이로웠고, 정리해두신 이력은 의외로 단출하여 놀랐다.

교단과 신학교는 물론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헌신하신 분이었으나 이런 직함이나 이력은 하나도 담지 않았다.  예수를 믿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 받았고, 어느 신학교를 졸업하고, 언제 어디서 목사안수를 받았는지, 또 어느 교회를 언제까지 섬겼고, 지금은 어느 교회의 원로목사라는 사실과 가족사항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한 인간의 벌거벗은 신앙고백이며 찬양이었다.
“목사님 왜 다른 이력들은 하나도 쓰지 않으셨나요?”
목사님은 고개를 저으며 “하나님 앞에 가선 그런 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게야” 하셨다.


본향 가는 순례자
-임종의 노래
 
한 줌 흙덩이 생명체로 보냄 받아 70여생 사는구나
언젠가 생명의 빛 여기 비추니
싹이 나서 꽃 피고 네 가지(four branches) 뻗어 기쁨 주네
이 어찌 하나님 은총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산고 끝에 네 열매 맺었지만
어느 가을 한 날 돌아보니 남은 것은 온통 오염된 것뿐
막상 본향 가까우니 마음이 주춤
지난날 돌이켜 생각하게 되는구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나 어찌 설까
힘들고 영 어두워 하나님 노여우실까봐
해 다 저문 후에나 돌아가고 싶다.
 
그래도 반드시 가야 하는 내 본향
내 이 더러운 옷 어떻게 입고 갈까 망설여지는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그 옷 입혀 부르시리.
 
2010년 10월 8일
원주중부교회 원로목사 박원규


글을 읽고 있을 때 목사님이 덧붙이셨다.
“우리가 회개하고 기도한다고 깨끗해지는 게 아니야. 긍휼과 자비로 옷 입혀 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그 나라에 간단 말이지. 나는 너무 행복해. 내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나는 한줌의 핏덩이였어. 그런데 내 인생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들을 세어보면 얼마나 감사한 것들뿐인지 몰라. 사람은 살면 살수록 더러워져.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옷으로 바꿔 입는 것, 이게 구원이야. 구원이 다른 게 아닌 게야.”
서울로 오는 늦가을은 더욱 충만하여 따뜻하였다.


박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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