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대는 세상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느라 허덕이지 않으려면 ‘다른 북소리’를 들어야 한다. 하늘의 북소리이다. 예수님은 참 멋진 고수(鼓手)이다. 예수가 치는 하늘 북소리를 들은 이들은 대개 옛 삶의 인력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길을 떠났으니 말이다.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대기업은 고사하고 정규직 일자리를 얻기도 어려운 판이다. 눈높이를 낮추면 일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은 루저가 되는 것 같아서인지 꺼림칙해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소수이고, 나머지는 열패감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마치 진액이 다 빠져나간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안쓰럽기 이를 데 없다. 경쟁에서 졌다고 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쟁의 쳇바퀴에서 자발적으로 내려온 이들이 훨씬 더 큰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른 삶의 가능성에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

신학교 선배 중에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계신 분이 있다. 그는 백수를 자처하며 유유자적하며 산다. 몇 해 전 그는 자기 삶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또 남들에게 변명도 할 겸해서 ‘백수를 논함’이라는 글을 썼다. 그 글을 볼 때마다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백수는 “뜻은 높이하고 마음은 너그럽게 하고,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우주를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을 가지되 나를 버릴 수 있는 맑은 마음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겨우 먹고 사는 문제, 집 장만하는 문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이들에게 그가 말하는 ‘우주를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은 매우 허황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툭 터지고 나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는 백수가 살아가는 법도 가르쳐준다. 백수는 자유인이어서 번거로운 일에 끼어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실도피적인 사람도 아니다. 그는 언제라도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백수로 살기 위해서는 삶이 청빈해야 한다. 단순히 가난하게 사는 게 아니라, 고상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일상사와 살림살이를 지극히 간소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꿈결에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듯 세상 사람들의 관습과 행복의 신화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대는 세상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느라 허덕이지 않으려면 ‘다른 북소리’를 들어야 한다. 하늘의 북소리이다.

예수님은 참 멋진 고수(鼓手)이다. 예수가 치는 하늘 북소리를 들은 이들은 대개 옛 삶의 인력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길을 떠났으니 말이다.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도,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도, 변혁에의 의지로 꿈틀대던 열심당원도, ‘나를 따라 오너라’ 부르시는 주님의 북소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땅히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하면 인생은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이 되고 만다. 하지만 갈 곳을 분명히 알고 갈 때 인생은 소명이 된다. 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인류의 가슴에 새로운 세상의 꿈을 심었다.

돈이나 권력이나 종교가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소중히 여김을 받는 세상의 꿈 말이다. 예수님은 가진 것이 없었지만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선물이 되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을 괴롭히던 음습한 마음의 상처는 치유해주시고, 넋이 빠진 듯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사람이 돈과 권력 앞에서,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얼마나 당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사람들을 해방의 길로 이끌려는 그의 꿈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예수는 하나님과 잇대어 사는 이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많은 이들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을 ‘복’이라 여긴다. 하지만 예수는 진짜 복은 서로를 귀중하게 여기고, 섬기기 위해 몸을 낮추고, 어려운 이를 잘 돌보는 것이라 가르친다. 예수는 우리에게 그런 세상을 가리켜 보이는데, 지금 우리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걷고 있다. 마치 애굽을 떠나온 탈출 공동체가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자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슬그머니 옛 삶을 향해 돌아서고 있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실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지금 우리는 주님의 이 탄식소리를 아주 생생하게 듣고 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병들고,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 또 삶의 지향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을 치유하고, 마음의 눈을 뜨게 하고,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고 싶어 하신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 일을 다 해낼 수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며,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적다. 하지만 천년의 어둠도 촛불 한 자루가 밝혀지는 순간 물러간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의 뿌리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돈도, 식량 자루도 신도 여벌로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물론 과제의 긴급성을 암시하는 말씀이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도 귀한 교훈이 된다. 주님의 일은 돈이나 치밀한 계획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천에서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는 서영남 씨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후원에 의지하여 노숙자들을 위한 밥을 짓는데, 그야말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이다.


내일 밥 지을 돈이 생길지 확신하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그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밥을 못 지은 적이 없었고, 밥을 못 짓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맡길 뿐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길로 삼고 걸어가는 이들은 마이너리티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류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다.


주류적 가치에 틈을 만들고 그 속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이다. 경쟁과 폭력이 정상이 된 세상에 협동과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는 사람들이다. 평화 없는 세상에 사느라 지친 이들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에 평화의 씨앗을 심는 이들이다.
덜 먹고, 덜 화려하게 살기로 작정하면 우리 앞에 새로운 길이 열린다. 생명과 평화의 새 세상을 열어가려는 주님의 꿈에 동참하는 일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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