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치 않은 눈

이번 사순절 시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들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언자들을 일컫는 말 가운데 하나가 ‘보는 사람’(seer, 선견자)입니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역사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사람이 바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느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즉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들을 바라보는 그 눈으로 우리를 보신다는 유다인의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의 바라봄은 어떠합니까? 따뜻하고 긍정적입니까? 아니면 차갑고 부정적입니까?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입에 도끼를 품고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말살이가 빚어내는 살풍경에 상처 입은 이들은 이 말을 실감할 겁니다. 그렇다면 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눈에 저울을 달고 나오는 것 같습니다. 누구를 대하든 우리 눈은 저울질에 분주합니다.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진실한 사람인지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인지, 따뜻한 사람인지 차가운 사람인지, 내게 도움이 될 사람인지 해를 끼칠 사람인지…. 그러한 판단에 입각해 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건성건성 대하는 경우도 있고,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그의 사람됨보다는 그가 누리고 있는 평판이나 직함에 눈길이 더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단점에 주목합니다. ‘저 사람 눈빛이 영 불길한데.' ‘저 가식적인 웃음이라니.'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묻었구만.' 이쯤 되면 그와의 창조적인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대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이것을 ‘시선의 폭력’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태도가 습관이 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긍정의 기운보다는 부정의 기운을 많이 쓰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렇기에 삶이 무겁고 힘겹습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사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주변을 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명랑하게 만듭니다. 나는 산에 오르신 주님의 얼굴이 희게 변화되었다는 말씀의 비밀이 뭘까 생각하다가, 예수님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긍정의 기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

주님은 “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도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몸도 어두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네 눈’이라는 말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바꿔놓아도 괜찮을 겁니다. 똑같은 대상도 바라보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달리 보입니다.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서 사람들이 본 것은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에 깃든 공허함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큰 차이입니다. 한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에게 돌팔매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사는 동안 입은 상처와 눈물에 주목하는 순간 누구도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바라봄이 왜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멸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다운 삶을 열망하는 약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런 이들과 사귀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 안의 빛

바라봄이 곧 삶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엄중하게 명령하십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 사물을 식별하는 기관인 눈은 바깥에 빛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캄캄한 밤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깥에 있는 빛 말고 우리 속에 있는 빛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어떤 빛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이 빛은 뭘까요? 고민을 하다가 창세기 1장이 떠올렸습니다.


창조의 첫날 주님이 만드신 것은 빛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주님이 발광체인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신 것은 넷째 날입니다. 그렇다면 첫날 창조한 빛과 넷째 날 창조한 빛은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넷째 날 창조한 빛은 세상의 사물들을 식별하는 데 필요한 외부의 빛입니다. 그에 비해 첫날 창조한 빛은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깃든 빛, 즉 하나님을 알아보는 영적인 빛이 아닐까요? 그 빛은 변하지 않는 빛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그 빛을 우리는 ‘길’, ‘진리’, ‘생명’이라고 부르는데, 요한은 그 빛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창조된 존재냐는 신학적 논쟁은 여기서 무의미합니다.


이제 곧 3·1절을 맞습니다. 독립선언서 말미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 신앙생활의 독립선언으로 삼고 싶습니다.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 때의 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 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이런 세상, 모두가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세상은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빛으로 세상을 보며, 주님의 구원 역사에 주저 없이 당당하게 동참할 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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