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본이 되고자 사람의 몸으로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이 삶의 터전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본받을 참다운 모범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의 본을 따라 삽니다. 인간을 본으로 삼는 자기도취증의 우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식이든 습속이든 가치 기준이든, 그 무엇이든 인간의 생각에 갇혀 굳어져버린 일상의 체제를 걷어치우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서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보고서가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피부색깔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의 노선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은 오바마의 얼굴색이 좀 더 밝고 연한, 그리하여 조금은 덜 꺼무스름하다고 보는 반면, 그의 노선을 지지하지 않는 미국인들은 오바마의 얼굴색이 좀 더 어둡고, 더 짙은 까만색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국이 백인 사회이므로 백인처럼 보이는 것이 정상이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비정상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오바마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그를 백인의 얼굴색에 가까운 피부로 받아들이고자 하고, 오바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를 백인의 얼굴색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흑인으로 보고자 한다는 것을 연구자들이 찾아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신의 취향과 느낌과 선호에 따라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리는 판단과 견해 모두 불완전합니다. 행여 보는 관점에 따라 어떤 한 쪽을 치켜세우고 어떤 한 쪽을 깔아뭉개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알고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져버린 백인 중심의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인간의 한계와 제한성을 떨쳐버리지 못한 생각과 느낌을 보여줄 뿐입니다. 두 집단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인간의 차원과 인간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한 채 아옹다옹 다투는 속 좁은 사람들의 흠집 내기와 트집 잡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듯 비좁은 자기중심의 생각과 안목에 붙박이 되어 움직일 수 없게 감금되어 있는 우리를 향하여, 성경은 깨우침을 줍니다. 고작 사람들 사이에서 더 낫고 더 못한 것을 과대하게 부풀려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를 향하여, 인간 사회의 단순한 지평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착된 삶 그것을 겨냥하여, 성경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아가라는 가르침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에게는 참으로 지나칩니다.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집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치이기 시작해서 사방에서 밀려드는 수많은 유혹과 압력에 시달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쳤는데, 또 집안 일로 들볶이는 것이 날마다의 삶인데, 어찌 이 삶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를 수 있는 것인가? 성경의 가르침을 두고 반문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다움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차마 감당할 수 없는 것 같은 그 일 곧,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그 일을 감당하라는 요구 앞에 서게 된 그리스도인, 그 그리스도인은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감당할 수 없는 것 같은 그 요구와 삶의 현실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과 갈등, 그 상황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비기독교인이라면 겪지 않아도 되는 긴장과 갈등을 기독교인이기에 피하지 못하고 마주해야 하는 도전의 상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하늘의 힘이 함께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당당한 노래가 있습니다. “내가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겁나지 않습니다” 하고 의젓하게 읊을 시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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