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동 슈바이처’ 윤주홍 장로]
가난하여 의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에겐 ‘하늘’인 셈이었고, 그 일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일이었다. 가령 1500원을 치료비로 받아야 하는데 500원 밖에 없다 하면 ‘1000원을 탕감해줄 테니 예수 믿어라’ 하였다. 수술하고도 돈이 모자란다, 하면 또 그리 하였다.

‘봉천동 슈바이처’라는 선입관을 갖고 윤주홍 장로(74세)를 만났다. 늦깎이로 시작한 의사의 길은 수련의 시절부터 무료 의료봉사의 길이었다. 아니 문학도에서, 다시 신학도의 길을 접고, 의학도가 되기 위해 시험을 치를 때부터 하나님께 그리 다짐하였다. 40년 가까이 가난한 병자들에게 ‘슈바이처’로 살아온 그의 인생행로는 곳곳에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들로 풍성하였다. 들꽃처럼 낮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들 몇 자락만 풀어본다.

#먼저 떠난 셋째 딸 이야기

병원 앞 큰길에서 자동차의 급하고 소름 돋는 정지음이 울렸고, 곧 운전수로 보이는 사내가 피로 얼룩진 아이를 안고 들어왔고, 병원 침대에 누였는데…, 그 아이가 셋째 딸이었다. 아이의 심장에 청진기를 대었을 때 심장은 이미 정지되었다. 심장파열이었다. 아이의 얼굴엔 미소가 남았다. 교회 갈 때도 아빠 손을 잡고 걸을 만큼 유난히 아빠를 따르던 아이였다.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대는 3월 어느 날, 개나리 따러 간다며 꽃신을 사달라던 아이는, 아빠 앞서 그가 온 길을 그렇게 돌아서 가버렸다.

아이를 먼저 보낸 뒤 가운을 벗었다. 병원 문을 닫고 아이가 묻힌 묘지를 하루도 빼지 않고 찾았다. 왕복 다섯 시간 거리를 오가면 하루해가 저물었고, 그렇게 꼬박 1년을 보내었다. 꼭 1년째 되는 날,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아이가 잠든 그 자리를 다녀오던 날이었다.
시골길에 양치기가 양 대여섯 마리를 이끌고 앞서 걷다가 도랑 앞에 멈추었다. 양이 도랑을 건너지 않으려고 뒷걸음질 하였다. 양치기는 능숙하게 나뭇가지 두 개를 놓더니 새끼 한 마리를 먼저 건너보냈다. 그러자 나머지 양들이 도랑을 건넜다. 그 광경 뒤에서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래, 아이가 먼저 천국으로 간 게야, 나를 인도하기 위해서 아이가 먼저 간 게야, 나를 인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튿날 다시 가운을 입었다. 비로소 마음 가득히 평화로운 봄 햇살이 와 닿았고, 감사의 기운으로 화사하였다. 아이를 친 운전수를 법정까지 찾아가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다.

#봉사, 하나님의 이름 위해 할 일

병원을 개원하기 전 경찰병원에 근무할 때부터 무료진료를 다녔다. 의사가 없는 섬을 주로 찾아다녔다. 서산 앞바다는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 번 섬을 찾으면 10년을 다녔다. 안면도서 40분 거리인 외도에는 60명 가까운 주민이 있었는데 그곳에선 30년 동안 진료봉사를 하였다. 그러면서 주민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다른 이들이 ‘봉사’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그 일을 할 때 그의 마음은 빚을 갚는 일처럼 여겼다. 이 일 하지 않으면 내 생명이 사라진다, 왜냐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이므로, 이 일 시키시려고 의사 되게 하셨으므로…, 그는 그렇게 일할 뿐이었다. 주님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하셨던가? 그렇다면 가난하여 의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에겐 ‘하늘’인 셈이었고, 그 일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일이었다. 그러니 가령 1500원을 치료비로 받아야 하는데 500원 밖에 없다 하면 ‘1000원을 탕감해줄 테니 예수 믿어라’ 하였다. 수술하고도 돈이 모자란다, 하면 또 그리 하였다. 봉천동에서 병원이 한창이었을 때는 20개 병실이 환자들로 가득 찼고, 병원 옆 여관들까지 그의 환자들로 가득하였다.

무의도 무의촌에도 가지만 고아원 양로원도 찾았다. 때가 되면 아이들 생일상 마련해주라며 계란과 닭고기를 사서 보내었다. 그는 어느 기자와 인터뷰할 때 이런 말을 하였다.
“카뮈와 슈바이처는 둘 다 노벨상을 받았어. 카뮈는 평생 자신만을 위해 돈을 쓰다 차 사고로 죽고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다 죽었어. 어떤 인생이 더 값질까? …봉사는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이야. 소멸시키지만 더 큰 빛으로 거듭나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

어느 해인가, 목련이 아직 살았을 때였다. 누군가 이사를 가면서 목련나무를 남겨주었다. 그 나무를 옮겨 심고 있는데 한 소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철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소년은 급히 책상 위에다 자장면 한 그릇을 놓고 떠나려 하였다.
“얘야, 난 자장면 안 시켰는데?”
그러자 소년은 “선생님!” 하며 눈물이 그렁거렸다.
“왜 그러느냐?”
그는 소년을 알지 못하였지만 소년은 그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 소년이 고아원에 있을 때 맹장염으로 많이 앓았을 때 그 고통을 삭혀주고 수술해준 분이었으므로. 소년은 그 고마움을 늘 품고 살면서 어떻게든 갚고자 하였단다. 고아원을 나와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면서 손님들로부터 거스름돈을 팁으로 받아 모았다가 자장면 한 그릇 값이 되었을 때, 소년은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을 생각하였다. 자장면을 좋아하신다던 선생님을 위해 소년은 자장면을 철가방에 넣은 뒤 길음동에서 버스로 서울역까지 와서, 다시 갈아타고 봉천동네거리에 와서, 또 다시 땀을 흘리면서 병원까지 뛰어온 것이었다.
소년의 마음을 생각하면 먹을 수도 없는 그 자장면 한 그릇을 비워냈다. 소년의 마음에 그의 눈물까지 담긴, 세상에서 가장 맛난 자장면이었다.

#나와 남의 생명을 살리는 일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왕진을 청하는 경우가 잦았다. 왕진을 가면 별일이 많았다. 그날도 마음에 상처가 남은 듯하였다.
한 사내가 아내가 아프다며 와 달라 하였다. 진료를 마칠 때쯤 그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내는 들어오는 남편을 향하여 따가운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돈이 있다고 왕진이야?”
그는 그런 말을 더 듣지 않고 그냥 돌아선다. 예수 믿으시오, 한 마디를 남길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한 아이가 다시 왕진을 청하였다. 가서 보니 산에다 움막을 파고 사는 집이었다. 환자는 영양실조에 폐렴을 앓았다. 열이 심하여서 서너 시간을 치료하였다. 아이의 아버지처럼 보이는 사내가 그를 붙잡았다.
“우리 아이가 죽을 거 같아요. 여기서 더 지켜보다가 자고 가세요.”
죽지 않는다,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그 무례함에 화가 났다. 괘씸하였고, 혼쭐을 내고도 싶었다. 그때 그의 가슴에서 격랑이 일었다. 작고도 또렷한 소리, 자신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회개하였다.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났다. 밤에 왕진을 다녀오는데 갑자기 두 사내가 칼을 들이대었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이 속에 의료장비들 있으니까 이 거 팔면 돈이 좀 된 것이다, 하였다. 가방을 뒤지던 사내가 갑자기 “이 사람 윤주홍이야, 저 아래 병원 윤주홍!” 하였다. 다른 사내가 “뭐? 엊그제 우리 아들도 신세를 졌는데…” 그러면서 그를 놓아주고 달아나버렸다. 결국 그날 밤의 일이 그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그렇게 보면 그의 일은 곧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박명철 기자


◇윤주홍 장로 이력
1934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남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신학대학 합격하였으나 병으로 입학 좌절
짧은 직장생활과 병으로 고난의 생활
고려대 의과대학 및 대학원 졸업(의학박사)
‘월간문학’으로 수필가 등단하고
‘시조생활’로 시조시인 등단
한국수필문학상과 펜문학상
국민훈장 동백장, 서울시민대상 등 수상
수필집 ‘작은 소망’ ‘낙조에 던진 사유의 그물’
시조집 ‘매향을 훔치려다’ 등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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