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추천받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 도서관에 희망 도서로 신청해두었던 책이 뒤늦게 신착 도서로 입고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별생각 없이 책을 빌려왔는데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고 펼쳐보지도 못한 채 반납해버렸다. 그 후 도서관에 갈 때마다 그 책이 눈에 걸렸다. 내가 희망해서 들어온 책이므로 왠지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부채감이 들어서. 그렇게 일종의 의무로 다시 펼치게 된 책 <걸크러시>.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 블로그에 연재되던 인기 웹툰을 책으로 묶었다고 했고, 다양한 시대 다양한 여성 이야기를 담았다고 했던 책이었다. 다른 나라, 다른 세대 여성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궁금한 주제였으므로 기대 반으로, 한편 어느 정도 아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시 읽겠거니 하는 조금은 심드렁한 마음 반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 웹툰, 소개하는 여성들의 라인업부터 심상치 않았다. 내 입장에서만 신선했던 것인지 몰라도 이 책에 실린 서른 명의 여성 중 아는 사람은 단 세 명뿐이었다. 생소한 이름들 밑에 ‘탐험가’, ‘등대지기’, ‘동물의 대변인’, ‘도적왕’ 등 부제가 붙은 목차에서부터 흥미가 돋아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따라 읽기 시작했다.

첫 인물이었던 ‘수염 난 여자’ 클레망틴 들레 이야기부터 난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혹은 내가 무심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고대부터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자기만의 삶을 온전히 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마치 지어낸 이야기처럼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짧게는 세 쪽, 길게는 일곱 쪽 정도로 요약된 이야기를 통해 그 새로운 이름들을 만나며, 그들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불타올랐다.

작가 페넬로프 바지외(Pénélope Bagieu)의 그림체와 연출력, 이야기를 풀어내는 화법 모두 훌륭했지만, 이 작품의 더 큰 의의는 이 놀라운 여성들을 응축된 지면에 효과적으로 소개해 그들을 더 궁금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나 싶었다. 원제가 <Culottées>(‘뻔뻔한 여자들’이란 뜻)였다고 하니 바지외가 여성의 삶을 풀어내는 직설적인 화법과 쭉쭉 뻗어나가는 거침없는 그림체, 탁월하게 그 인물의 핵심을 뽑아내는 작가적 안목에 더없이 어울리는 원제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그렇게 더 크고 넓은 세계로 나가게 만드는 재미있고 충실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이 멋진 여성들을 더 알고 싶어 자료조사를 시작했더니, 책에 소개된 여성들의 시대와 문화권과 역할이 다채로운 만큼 이들을 만날 수 있는 통로도 다채로웠다. 클레망틴 들레에 관해서는 한 팟캐스트에서 프랑스 관련 전공자로부터 더 디테일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17세기 아프리카 대륙의 ‘은동고와 마탐바 왕국의 왕’이었던 은징가는 한 OTT 오리지널 다큐 시리즈로 제작된 <아프리카 퀸:은징가>라는 작품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재연과 인터뷰가 적절하게 조합된 퀄리티 높은 다큐를 보며 탁월한 전략가이자 왕이었던 은징가에 대해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독재자에게 저항했던 마리포사 자매 이야기는 그들을 다룬 테드 강연에서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고, ‘아파치 전사이자 주술가’ 로젠에 대해서 알아보다가는 <잊혀진 여성들>이라는 뉴스레터를 알게 되어 구독 버튼을 눌렀다. ‘무용가, 레지스탕스 활동가, 한 가정의 엄마’ 조세핀 베이커는 어린이책 <검은 비너스, 조세핀 베이커>(패트리샤 흐루비 파월+크리스티안 로빈슨)라는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작 그림책을 읽으며 쉬운 언어, 그러나 예술적인 그림과 또 다른 스토리텔링으로 만나 볼 수 있었다.

여기에 일일이 다 말하지 못한 다른 스물다섯 명의 여성들은 이 책에서 꼭 확인해 보시면 좋겠다. 고대의 부인과 의사,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회운동가, 1996년생 아프가니스탄 래퍼, 2시간 50분 안에 마라톤을 완주한 최초의 여성 육상선수까지. 여성들에게 움직일 힘을 부여하고 새로운 영감을 선사할 여성들이 이 책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책, 음악, 유튜브 영상, 다큐멘터리, 팟캐스트 등 숨은 콘텐츠로 안내하는 키워드가 가득하다. 그야말로 모든 콘텐츠의 보고(寶庫)임을 알려주는 책!

박혜은

질문하는 사람. 책과 사람 잇는 일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 현재는 뉴스레터 에밀앤폴M 발행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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