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여가연구소 옥성삼 소장이 소개하는 묵상하기 좋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걸을 만한 공간을 소개한다. 전국 곳곳에 숨겨져 있는 귀한 ‘이야기’가 있는 곳을 다니다보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가를 만나게 될 수 있을 것. <편집자 주>

딜쿠샤와 은행나무
딜쿠샤와 은행나무
​    인왕산 남쪽 무악동 성벽
​    인왕산 남쪽 무악동 성벽

서울의 봄과 필운상화(弼雲賞花)

서울의 봄을 먼저 맞이하고 활짝 꽃피우는 언덕이 인왕산 남쪽 도성길이다. 예부터 한양 최고의 봄꽃 구경을 필운상화(弼雲賞花)라 했다. 한양의 선비는 오백 년 넘게 필운대 일대를 물들이는 봄꽃의 향연을 즐겨 찾았다.

관악산을 넘은 봄바람은 양화나루 버들강아지를 깨우고 만리재와 애오개를 훌쩍 건너뛰어 이곳 경희궁 후원 서암(瑞巖)에 엎드려 상서로운 봄이 왔음을 고한다. 알현을 마친 봄의 전령사는 경희궁 후원을 넘어 한양도성 옥개석을 쓰다듬으며 순성길 안팎의 골짜기마다 울긋불긋 개나리 살구꽃 진달래를 꽃피운다. 서암이 광해의 맘을 사로잡아 창건된 경희궁은 숙종부터 여러 왕들이 사랑한 서궐이었고,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꽃피운 공간이다.

뒤늦게 서울의 봄길을 알아차린 일제는 1907년 창경궁 동쪽 마두산에 설치한 기상관측소를 1932년 이곳 경희궁 서암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옮겼다. 도성의 허리를 자르고 성 안팎으로 땅을 돋우어 건물을 세우고 마당에 왕벚나무와 단풍나무를 심어 식물계절 관측 표준목으로 삼았다. 해방 이후 50여 년 서울기상청으로 사용된 건물은 지금 국립기상박물관이 됐고, 성벽이 끊어진 마당엔 매화와 진달래가 추가로 자리했다. 왜 이곳에 기상관측소를 세우고 계절을 살피는 나무를 심었을까? 현장에 가보면 알게 된다. 도성 안이 내려다보이는 경운궁 상록원에 러시아 공사관이 들어선 것도 유사하지만, 핵심은 한양의 봄길 때문이다.

딜쿠샤와 고향의 봄

경희궁 흥화문과 서대문에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서울의 봄길은 한양도성 성벽을 중심으로 바깥 기슭에 경교장, 월암공원, 홍난파 가옥, 베델의 집터, 딜쿠샤 그리고 박완서 선생이 청소년기를 보낸 무악동으로 이어진다. 도성 안쪽으로는 경희궁, 기상박물관, 남감리회선교부, 사직단, 황학정, 필운대 그리고 수성동계곡으로 연결된다.

김구 선생을 기억하는 경교장을 나와 월암공원에서 마주하는 성벽은 힘차고 우람하다. 도성이 끊어진 언덕에 단풍나무와 왕벚나무가 망루처럼 서 있다. 성벽 아래 베델의 집터와 1930년대 독일풍으로 지은 홍난파 가옥이 있다. 근대음악의 선구자 난파 선생이 영욕의 6년을 보낸 자취를 만날 수 있다. 이원수 작 홍난파 곡 ‘고향의 봄’은 창원 소답동이 배경이지만, 이곳 집 앞 월암공원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다.

200여 미터 거리에는 행촌동 은행나무와 딜쿠샤가 있다. 필운대에 살던 권율이 사위 이항복에게 집을 물려주고 성벽 넘어 새집을 마련해 살게 된 것은 백사의 짓궂은 장난이 귀찮아서 그랬다고 한다. 500년 은행나무 옆엔 ‘기쁜 마음의 궁전’을 뜻하는 딜쿠샤(Dilkusha)가 잘 복원되어 길손을 맞이한다. 19세기 말 운산금광 기술자였던 아버지와 함께 내한한 앨버트 테일러가 영국 출신 메리 테일러와 결혼하며 1924년에 완공한 멋진 저택이다. UP통신원 기자로도 활동하며 3·1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테일러 부부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이다.

싱아를 찾아볼까?

딜쿠샤에서 동쪽 빌라 쪽문을 지나면 복원된 한양도성이 인왕산 줄기를 따라 범바위로 이어진다. 1938년 서울로 이사 온 박완서 선생이 선바위 아래 현저동(무악동)에 살면서 허물어진 성벽을 넘어 매동초등학교를 다니던 산길이 있다. 필운상화의 봄길도 그땐 지천으로 널렸던 싱아마저 찾지 못할 만큼 황량했던 모양이다.

암문을 통해 성벽 위에서 해넘이를 맞으면, 순간 인왕산 성벽을 따라 주황색 불꽃이 피어난다. 실낙원 에덴을 휘두른 라하트 하헤렙(불의 칼)처럼 불꽃으로 피어난 도성이 눈부시다. 한양도성길 45리, 사계절 강열한 불꽃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인왕산 바깥 순성길이다. 1930년대 말 홍난파, 메리 테일러, 박완서 선생이 서울의 봄길을 따라 살았는데, 난파와 박 선생의 기록에서 딜쿠샤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 왜일까? 올봄에도 이 길에서 사라진 싱아와 까치샘을 찾으며 고향의 봄 혹은 서울의 봄을 느껴보자.

옥성삼

생활여가연구소 소장으로 서울 골목길 순례 등 여가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이다. 저서 및 공저로 <왜 조선교회는 두 개의 문을 만들었는가>, <디지털시대의 교회와 커뮤니케이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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