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아이들이 참 좋아하는 낱말이다. 아이들은 방학을 기다린다. 방학은 등교와 하교를 되풀이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를 준다. 여행하고, 쉬고, 책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방학에도 비슷한 일상을 되풀이한다. 학교 대신 학원에 간다. 여행한다고 해도 비슷한 과정을 되풀이한다. 차를 오래 타고, 잠깐 구경하고, 맛집을 찾아가서 익숙한 맛을 즐긴다.

방학 때 자녀와 여행을 자주 다녔다. 2박 3일, 가끔 3박 4일 동안 우리나라 여기저기를 다녔다. 관광지에도 갔지만 문화재, 작가 생가나 문학 작품의 배경을 찾아다녔다. 여행할 곳과 관련된 책을 미리 읽었다.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갈 때도 먼저 책을 읽혔다. 나와 여행하는 아이들은 “이런 여행은 처음이에요. 그런데 재미있어요!” 했다.

해마다 ‘학부모 문학기행’을 계획한다. 2023년에는 두 번이나 갔다. 봄에 김용철 작가 작업실, 박수근 미술관을 찾아갔다. 학부모들이 좋다고, 또 하자고 해서 가을에 한 번 더 갔다. 41인승 버스를 예약하고 신청자를 모집했다. 나와 교감 선생님 외에 39명이 갈 수 있는데, 46명이 신청했다. 전교생 48명 중 1/3 이상 학부모와 자녀가 참여했다. 차에 타지 못한 가족은 자차로 따라오겠다고 했다.

한 달 전에 탁동철 작가가 쓴 <길러지지 않는다>를 나눠주고 읽어달라고 했다. 버스에서 <길러지지 않는다>로 초성 퀴즈와 낱말 퍼즐을 만들어 나눠주었다. 속초로 가면서 부모와 자녀가 낱말 퍼즐을 풀었다.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에서 설명을 듣고 유적 체험에 참여했다. 지역 서점을 구경하고 책을 샀다. 석봉도자기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했다.

가장 좋았던 건, 탁동철 작가를 만난 시간이다. 작가님이 계간 시집인 <올챙이 발가락>을 나눠주며 가족마다 시를 하나씩 고르라고 했다. 그런 다음 낱말 카드를 주면서 고른 시와 낱말을 연결해보라고 했다. 짧게 설명하고 ‘해보면 안다.’ 하며 한번 해보라고 했다. 5분쯤 지나고 발표를 시켰다. ‘시간이 부족할 텐데…’ 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발표를 들었다.

열일곱 가족이 돌아가며 시를 낭송하고 낱말을 연결해서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작가님이 이번에는 시를 써보자고 했다. 설명은 딱 하나만 했다. “작게, 아주 작게, 더 작게” 보라고 했다. 축구가 아니라 축구공을, 축구공이 아니라 축구공에 있는 무늬를 보라고 했다. 다시 5분쯤 지나고 발표했다. 2학년 아이는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하얀 달걀이 있는 만둣국”이라 했다. 점심으로 만둣국을 먹었는데, 달걀이 풀어져 있었다. 2학년 아이는 달걀 알레르기가 있어 달걀을 못 먹는다. 아이에게 달걀은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물체다. 그냥 만둣국이 아니라 아이에게 딱 맞는 만둣국을 표현했다.

우리 반 몇 명도 시를 완성해서 읽었다. 작가님이 떡을 주셔서 먹었는데 지환이가 <떡 속의 호박>이란 제목으로 시를 썼다. ‘와~’ 내가 가르친 시와 많이 다르다. ‘탁동철 느낌이 나는’ 시를 썼다.

<떡 속의 호박>

떡 속에는 여러 가지 곡물이 있다.

콩, 팥, 쌀

그런데 거기에 호박 하나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나도 나도 떡에 들어갈래!”

하고 말하는 것처럼.

글은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가르치면 아이들은 권일한 느낌의 글을 쓴다. 탁동철 작가를 잠깐 만났더니 탁동철 느낌으로 썼다. 작가님이 잠깐 가르쳤는데 글에 탁동철 색채가 깃들었다. 자기만의 색깔을 입히는 가르침이라니! 이 아이들이 학원에 가면 비슷비슷한 글을 쓴다. 비슷한 맛집, 비슷한 숙소, 비슷한 여행 말고 아이들이 자기만의 색깔을 가질 수는 없을까?

그러려면 부모와 교사가 자기 색깔을 가져야겠다. 30분 만에 자기만의 색깔을 입힌 작가처럼. 남 따라 하는 거 말고, 자기만의 색깔 말이다.

권일한

강원도 시골에서 자라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30년 가까이 학생들과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문집을 만들고 있다. <곁에.서.>, <성경을 돌려드립니다>, <학교에서 외계인을 만나다> 등 많은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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