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ㆍ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루시드폴 〈은하철도의 밤〉ㆍ 애니메이션 〈은하철도의 밤〉

집순이는 방에 앉아, 이 콘텐츠에서 저 콘텐츠로 넘어 다니는 일이 여행처럼 즐겁다. 18세기 말 작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Xavier de Maistre)는 금지된 결투를 벌인 죄로 42일간 가택 연금형을 받았을 때 자기 방 침대에서 의자로, 의자에서 초상화로 넘어가며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 2016)이란 책을 썼고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 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18세기 메스트르는 자기 방에 있는 사물과 작품을 넘나들며 여행했는데, 21세기의 집순이인 난 방에서 콘텐츠를 넘어 다니며 여행을 한다.

콘텐츠에서 콘텐츠를 넘어 다니는 여행이라. 그것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지난 연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보고 영화가 창조한 세계에 푹 빠져 영화와 관련한 기사를 이것저것 찾아 읽었다. 그러다가 히로카즈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이 시나리오를 읽고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이 떠올라 영화에 나오는 두 소년 배우에게 이 작품을 읽으라고 권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럼 나도 따라 읽어야지. 그렇게 여러 번역본 중 가장 믿을 만한 어린이책 출판사의 번역본을 골라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을 읽기 시작했다. 밤의 이야기이니 밤에 읽어야지 하고, 겨울밤에 읽기 시작한 이 작품의 분위기가 어찌나 처연하고 기묘하던지. 문득 이에 어울리는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혹시 내가 아는 노래인 루시드폴의 ‘은하철도의 밤’이 이 작품과 관련 있는 건가? 평소 무심히 듣던 그 노래를 재생한 후 상세정보를 찾아보았다. “일본의 농부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읽고서 쓰게 된 곡이다. 이 곡을 들으면 노래라는 열차에 몸을 싣고 환상 여행을 떠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 정말 이 작품을 읽고 쓴 곡이네? 반가운 마음에 이 노래를 무한 재생해 BGM 삼아 작품을 읽었다.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영화 <괴물> 속 두 소년 요리와 미나토만큼이나 <은하철도의 밤> 속 두 소년 조반니와 캄파넬라가 전해준 여운이 깊어 이 작품을 더 누리고 싶어졌다. 혹시 관련 콘텐츠가 또 있지는 않을까 찾아보니 이 작품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마침 내가 구독하고 있는 OTT 플랫폼 W에서 1985년의 이 애니메이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1시간 47분의 러닝타임 동안 애니메이션이 구현한 이 작품 특유의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정서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나니 <은하철도의 밤>이 내 안에 안착한 것만 같다. 한 영화에서 두 소년이 자아낸 묘하게 슬프고 아름다운 세계에서부터 찾아온 <은하철도의 밤>을 책으로, 노래로, 애니메이션으로 다채롭게 경험하고 나자, 원소스멀티유즈(OSMU)가 일상화한 21세기 문화인으로서 한껏 만족감이 올라온다. 헛! 찾아보니 국내 창작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있네? 심지어 지난 12월에 시작해 지금 한창 공연 중이다. 시간 되면 한 번 보러 가야겠다.

이렇게 한 콘텐츠에서 시작해 다른 콘텐츠로 넘어가는 여행은 같은 작품을 다양한 장르로 구현한 것을 찾아가는 여정일 수도 있고, 한 작품에 모티브를 주거나 그 작품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준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일 수도 있다. 여행 방식은 콘텐츠마다 다르게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 영감을 준 작품이 바로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이라고 하니 ‘은하철도’ 콘텐츠 기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W플랫폼에 TV애니메이션 113화 대기 중).

그 와중에 최근 새롭게 시작한 콘텐츠 여행이 하나 또 있다. 얼마 전 애플제품을 새로 샀더니 애플티비 무료 3개월 이용권을 주는 게 아닌가. 웬만한 OTT 플랫폼을 다 구독하는 나도 애플티비만은 구독하고 있지 않던 차, 설레는 마음으로 애플티비에 들어가 3개월 동안 뭘 볼까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와, 내 취향 작품이 수두룩하다. 그중에서도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디킨슨>을 첫 작품으로 골라 즐거운 정주행을 시작했다. 옆에는 디킨슨의 시집을 쌓아두고. 그렇게 <디키슨> 회차를 거듭할수록 드는 걱정. 큰일이다. 이것도 구독해야 할 것 같아.

박혜은

질문하는 사람. 책과 사람 잇는 일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 현재는 뉴스레터 에밀앤폴M 발행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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