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대표 성우 고은정

1954년, KBS 성우극회 1기로 입사한 성우 고은정. 성우 데뷔와 함께 ‘천의 목소리’라는 호평을 받았고, 인기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주인공의 목소리 더빙은 대부분 고은정의 몫이었다. 1,000여 편 영화 더빙은 물론 배우 엄앵란에서부터 김지미, 문희, 윤정희, 남정임, 정윤희, 안인숙까지 당대에 내로라하던 여배우들의 목소리를 대신 했다.

그런데 당연해 보이기도 한 국민훈장 동백장,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뒤에는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극한 은혜가 자리하고 있었다.

“상식을 벗어날 만큼 바삐 살았던 세월”

상식을 벗어날 만큼 바삐 살았다. 시간이 모자라 늘 앞에 쏟아져 와있는 일들을 소화해낼 수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정말 바보같이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어요. 그 와중에 연년생으로 아이 넷을 ‘자축인묘’로 낳았고요. 낮에는 방송하고 밤에는 영화 더빙하며 잠이 모자라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살았어요. 어떤 때는 아이를 낳는 날까지 방송국 현장에 있어야 해서, 진통하면서까지 방송을 했어요.”

방송국에까지 산파가 와서 기다렸단다. 그렇게 분주하다보니,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가 없이 열심과 성실을 다해 일했고, 그 결과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냥 아버지를 불렀지요.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하나님은 내 땅의 아버지이자 동시에 하늘 아버지셨거든요. 구구절절 읊으며 기도드리지 않아도, 그냥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다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마냥 그 아버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 와중에 잊지 않았던 것은, 남을 돌아보는 거였단다. 어디서 그런 마음이 생겼을까.

페스탈로치 같은 전도사님 영향

해방 후 주일학교에 다니던 때, 열정을 가지고 돌보며 신앙과 가치관을 형성시켜주신 박하양 전도사님, 교육학자 페스탈로치 같으셨던 그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덕분에 지금껏 하나님을 부르며 그 은혜 아래 살아가고 있다고 그는 고백한다. 전도사님처럼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열심을 내고 싶었던 거다.

이제 자녀들이 다 장성해서 떠나고, 현역에서 물러나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와 말씀의 은혜를 나누는 일이 주업이 되었다. 매일 200여 명의 지인들 이름을 하나님께 올리는 일과 말씀을 나누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 저 재주 없는 거, 아시지요? 제 관심 안에 있는 사람들 이름을 올려드립니다. 들으시고 그들을 살펴주옵소서.”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주소록에 빨간펜 파란펜으로 표시해놓은 지인들의 명단을 기도로 올려드린다.

자신이 직접 전도는 못하니까, 신앙이 있는 이든 아니든 계속해서 그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님께 아뢴다고.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 아프다고 연락 오는 사람들, 좀 자중했으면 좋을 것 같은 후배들, 교회를 위해, 작가 신우회를 위해, 은퇴 여선교사들을 위해. 자녀를 위해….

정혜선 강부자 김수희 이선영 송도순 박민아 배한성 김종환 서혜정…. 이렇게 매일 이름을 불러 기도한다. 떠오르는 대로.

1960년대 후반 한양 남산 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사진 왼쪽부터) 강부자, 고은정, 김순원, = 한국영상자료원
1960년대 후반 한양 남산 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사진 왼쪽부터) 강부자, 고은정, 김순원, = 한국영상자료원

암흑 속에서 더욱 가까이 만난 하나님

오래 전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만난 적이 있다. 집안의 동생이 집문서를 빌려간 지 1년쯤 후에,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서 큰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다. 환갑을 넘긴 때였다. 아이들은 모두 외국 유학중이던 때였기에 더욱 앞이 캄캄했다.

“그때 제가 세상을 보니, 황금이 우상임을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기도했어요. 알뜰하게 살아왔는데, 하나님, 너무하시잖아요! 환갑 넘은 나이에 이게 뭡니까?”

그냥 엎드려 기도했단다. 방언기도가 쏟아져 나오면서, ‘네가 뭔데 정죄하느냐? 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너를 생명책에 기록했다.’는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음성으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으니 생각이 바뀌었고, 생각이 바뀌니 세상 어려움이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하나님은 반드시 개인적으로, 1:1로 만나주신다는 체험적 신앙, 경험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아버지께 혼나고 더 감사하게 되었단다.

매년 성경 2독을 하는 습관 20여 년

성경을 읽다가 말씀에 위로를 받으니, 암흑 같고 지옥 같던 세상이 갑자기 달라졌다. 덕분에 매일 성경묵상을 프로그램을 따라 하고 있다. 그렇게 읽다보니, 매년 시편 두 번, 구약 한 번 신약 두 번, 이렇게 읽게 된다. 20년이 넘었으니, 40독을 한 셈이 됐다.

이쯤되니, 복음이 바탕 되지 않은 이야기는 다 허사로 여겨졌다. 알맹이 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가까운 이들부터 영혼을 구하고 싶어서 성경말씀을 보내기 시작했다.

“병아리가 계란에서 나오려면, 바깥에서도 자극을 주어야 하잖아요? 줄탁동시(啐啄同時). 그 열매가 언제 어떻게 맺어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요.”

‘세빛자매관’ 관련 이야기

얼마 전에 하늘나라로 떠나신 장신대 주선애 교수께서, 홀몸으로 선교사로 나갔다가 은퇴한 여자 선교사들을 위해, ‘세빛자매관’을 준비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은 그는 마음의 작정을 했다.

“주선애 교수께서 강원도 문막에 은퇴한 여자 선교사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때, 내가 죽을 때 장례비용으로 준비하느라 적금을 들고 있었는데, 마침 그게 만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걸 그곳에 기부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적금이 5천만 원이었는데, 마침 여선교사를 위한 방 하나 마련하는 금액이 5천만원이었단다. KBS 성우로 함께 일하던 후배가 독신으로 인도 선교사로 헌신해 많은 사역을 하고 있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독신 여자선교사가 사역을 마치고 은퇴하고 나면 갈 곳이 없어 어려워진다는 현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무엇보다 이 귀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고은정 선생의, 주변을 돌아보고 배려하고 섬기는 마음, 참 따뜻한 어머니 마음을 그의 성품이라고 가까운 지인들은 이야기한다.

“남은 시간을 복되게, 의미 있게”

“이제 여든이 넘어 정리해야 할 것이 많아요. 제 남은 꿈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어머니 이야기’를 정리해서 남기려 합니다. 우리 근대사는 ‘어머니’가 살렸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절실히 이걸 깨닫기 때문에, 우리 할머니로부터 이어져 오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해주지 못한 안타까움이 가장 크다고 고백하며, 그러나 균형 있고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자라기까지는 계속 믿음으로 기도하는 여생을 살겠다는 다짐을 말한다.

박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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