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여가연구소 옥성삼 소장이 소개하는 묵상하기 좋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걸을 만한 공간을 소개한다. 전국 곳곳에 숨겨져 있는 귀한 ‘이야기’가 있는 곳을 다니다보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가를 만나게 될 수 있을 것. <편집자 주>

석파정 단풍=사진 박춘화
석파정 단풍=사진 박춘화

11월엔 단풍과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명소 혹은 추수가 끝난 들판도 좋겠지만 자문밖 늦가을에는 이 계절을 채우고도 남을 경이로운 풍경과 이야기가 가득하다. 북악산 서쪽 허리를 감싸 오르는 한양도성에 자주빛 노을이 아름다워 자하문(紫霞門)이라 한다. 한양도성의 8개 성문 중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이란 공식 명칭이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곳 사람들은 ‘자하문’이라 부른다.

성문을 나서면 별유천지(別有天地)가 펼쳐져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 부른다. 자문밖을 이루는 다섯 동네(부암, 홍지, 신영, 구기, 평창)는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과 삼국전쟁 때 전사한 화랑을 기리는 장의사(현 세검정초등학교)까지 거슬러 1500여 년의 역사 터무니가 있다. 고려시대는 왕들이 북한산 문수봉으로 참배를 가거나, 개경에서 남경(현 경복궁)으로 내려오는 길목이었다. 홍제천 맑은 물과 너럭바위가 있는 자문밖은 한지를 만들던 국립조지서가 구한말까지 있었다. 세종 때 젊은 학자들에게 책읽기 휴가인 사가독서가 시작된 곳이고, 조선의 귀공자 안평대군이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짓고 무릉도원을 꿈꾸던 터이다.

자문밖의 중심지 세검정(洗劍亭)은 독서당 휴가자의 쉼터로 시작되어, 연산군 시절엔 탕춘대 정자이기도 했다. 인조반정 때 창의문 빗장을 부수고 성공한 이들이 칼을 씻고 의로움을 세웠다는 세검입의(洗劍立義)에서 세검정이 유래한다지만, 세검(洗劒)은 칼을 씻는 것이 아니라 붓을 씻는 곳이었다. 임금 사후에 실록편찬이 마무리되면 수 만장의 초벌 기록한지를 물에 씻어 재활용하고, 편찬에 참여한 학자와 관리를 위로하는 세초연(洗草宴)을 베푸는 곳이 세검정이었다. 자문밖은 남서쪽으로 탕춘대성, 북쪽의 북한산성 그리고 동으로 한양도성으로 둘러싸였고, 숙종 이후 한양을 지키는 북부사령부가 주둔한 군영이었다. 지금도 그 군영의 이름과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광화문에서 시내버스로 10여 분이면 자하문 고개에 이른다. 정류소에 내려 길을 건너면 서시와 별 헤이는 밤의 시인 윤동주 문학관이다. 수돗물 가압장이던 콘크리트 건물을 리모델링한 문학관은 사진과 시집 등을 볼 수 있는 1전시실, 감옥을 상징하는 3전시실에서는 시인의 삶을 담은 영상다큐를 볼 수 있다. 텅 빈 2전시실(열린우물)은 사계절 언제와도 같은 전시물이 없고 늘 새롭다. 열린 천장으로 별과 바람과 구름이 흐르는 케노시스를 온전히 체험한다.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려 보인다. 고개를 돌리면 한양도성을 따라 창의문과 삼애교회당이 옆에 서 있고, 산으로 둘러싸인 자문밖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한 여인의 헌신으로 지은 삼애교회당은 순성길에 만나는 100여 개 예배당 중 으뜸이다. 교회마당엔 감이 익어가고 성벽과 맞닿은 작은 틈새엔 붉은 단풍과 나무십자가가 발길을 붙잡는다. 성벽을 따라 인왕산 쪽으로 걸으면 한국의 돌과 나무 조형물로 조성한 넓은 목석원이 있다. 다시 자하문 쪽으로 내려오면 좌옹 윤치호 선생의 별장 부암정, 안평대군의 무계정사터와 오진암 한옥을 옮겨와 만든 무계원, 유금와당박물관 등을 만난다. 북악산 쪽으로 서울미술관, 환기미술관, CCC본부, 카페 산모퉁이와 백사실 계곡 등으로 이어진다.

자하문(창의문)

서울미술관과 연결된 ‘석파정’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정원이자 최고의 별서이다. 고종이 하룻밤을 지낸 별채를 비롯 청나라풍 정자 유수성중관풍루(석파정), 소수운렴암과 삼충석탑을 둘러싼 단풍나무숲 등 별서의 풍경과 역사 이야기가 기름진 곳이 석파정이다. 조금 내려오면 석파정 별채였던 석파랑과 카타콤 카페인 몽핀 그리고 홍제천 물길을 따라 홍지문과 오간수문 세검정 등이 길손을 반긴다.

늦가을의 풍경과 역사의 향기 그리고 삶과 신앙의 이야기가 자주빛 노을로 물드는 자문밖 산책을 그 어떤 여행과 견줄 수 있겠나?

옥성삼

생활여가연구소 소장으로 서울 골목길 순례 등 여가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이다. 저서 및 공저로 <왜 조선교회는 두 개의 문을 만들었는가>, <디지털시대의 교회와 커뮤니케이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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