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한국은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는 복구에 한창이었다. 정치, 사회,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친 재건 작업에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한성서공회도 본연의 사업을 재개하고자 “공회 사업 선전과 성서 보급의 편의를 위하여” 잡지를 발행하게 되었는데 바로 <성서한국>이다.

<성서한국> 창간사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 ‘우리말’을 지켜낸 것이 성서였음을 밝힌다. 나아가 우리말의 어휘를 늘리고, 각 지방 사투리를 조화시켜 표준어를 보급하게 된 데 기여했음도 강조한다. “성경이 얼마나 우리 민족문화에 큰 공헌을 한 것을 알 수 있고 그런 성경을 발행 반포한 성서공회의 공적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묻혀 잊힐 수 있는 역사를 이제 여기로 소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한다.

특히 창간호부터 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김양선(1907~1970)의 “한국의 성서 번역사”가 연재되었는데, 이 연재는 약 5년간 이어졌다. 김양선은 한국 기독교의 전래를 주체적인 수용의 역사로 읽은 최초의 역사가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이 땅에 복음을 전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혁적인 한국인들, 즉 서북청년들의 자발적인 기독교 수용이 한국교회의 첫 출발이었다고 본다. 본지의 ‘성경과 사람들’ 1호부터 소개했던 서북지방의 봇짐장수 서상륜, 백홍준, 이흥찬 등이 바로 그들이다.

김양선의 기여는 그 청년들이 받아들였던 기독교,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와 성서번역의 역사를 이었다는데 있다. 1884년 이전 만주와 일본에서 이루어진 한글성서 번역사를 다루었고, 1885년 이후 국내 번역이 시작된 이야기까지 총 20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 무렵 김양선의 삶에는 큰 시련이 다가왔다. 이른바 ‘김양선 필화사건’(필화筆禍 : 붓으로 인해 일어난 재앙이라는 뜻으로 창작자의 글이 법적, 사회적 제제를 받는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책은 1956년에 나온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인데, 그는 “서술하되 해석하지 않는” 방법론, 즉 객관적인 시각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기록해 보고자 한 작품이다. 이 역사서는 교회 내부의 논리나, 영광스러운 승리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신사참배 가결이라는 부끄러운 역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숨기고픈 역사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하여, 그 역사와 관련된 사람들과 유족들의 거친 반발로 그가 속한 교단 총회에서 판매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성경이 한국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소환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서공회는 이런 정신을 이어갔다. <성서한국>은 창간호부터 학생, 농민, 군인 등 젊은 세대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반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성서가 처음 한국에 확산된 것은 나라의 힘이나 경제적인 능력에 기대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급여를 마다하지 않은 권서와 매서인들의 헌신이 있었고, 그들이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인 성경을 전달한 역사이다. 1955년 당시 권서와 매서인들의 활동은 이미 지나간 역사였다. 그 시대에는 새로운 일과 사업들이 필요했다. 김양선의 연재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소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앞으로 성서공회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과거의 사건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때로는 잊고 싶은 과거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을 기록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다시 소환한다. 어떤 의미에서 역사가의 이러한 노력은 ‘잘 잊기 위함’ 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살아야 하는 우리이기에, 과거에 머물러 있기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고, 좋은 이별을 하는 것. 그리고 이별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 이제 여기를 잘 살기 위한 우리의 숙제가 아닐까.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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