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예 권사, 60년째 지켜온 화요예배…복된 공동체 이뤄

60년째 화요예배를 지켜온 김경예 권사
60년째 화요예배를 지켜온 김경예 권사

무언가 한 결 같이 지속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매주 화요일 오전 11시. 이 시간을 지켜 60년째 가정예배를 드려왔다면 특별한 사연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은 ‘사역’이다. 구순을 넘기는 김경예 권사(보린교회·사진)는 오로지 가정예배에 집중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고백한다.

어린 시절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며 자라났다. 아침에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면 저녁에라도 꼭 예배드리는 것을 지켰다. 시집을 와보니, 집안마다 문화가 달라서 그렇게 하지 못하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네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느냐?”

1964년, 시골에 사시던 시어머님의 병환으로, 시부모님을 서울로 모셨다. 시어머니는 서대문의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담당 의사 소견이, 환자의 생명이 2주, 길어도 두 달을 넘지 못한다는 거였다. 짧은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생명줄 앞에서, 며느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일과 얼마 후 치러야 할 장례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다가 벽력같은 음성에 놀라 깨었다.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느냐?”

귀청이 떨어져나갈 것만 같은 엄청난 음성에 놀라서 그대로 엎드렸다.

“왜, 네 시어머니가 죽는다고만 생각하느냐?”

두 번째 음성이었다.

시어머니 건강을 위한 기도

의사로부터 시어머니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판정을 받았던 터라, 이게 무슨 음성인가 싶었다. ‘그럼, 사실 수 있다는 말씀 아닌가.’ 그때부터 살려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온 가족과 친지, 지인들이 집에 모여 매일 예배하며 시어머니의 회복을 간절히 기도했다. 50여 명씩 모이는 이 예배는 매일 계속되었고, 실제로 시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해 퇴원하셨다.

놀라운 일이었다. 함께 기도하던 모든 이들이 놀랐고, 감사한 마음과 한편 두려운 마음에 계속 예배하며 기도했다.

시아버지의 강권, “이제 그만해라!”

하나님의 그 음성이 귀에 쟁쟁하여, 예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며느리를 보는 시아버지는 근심이 컸다.

“이제 그만 해라. 너처럼 하다가는 집안 살림 다 들어먹겠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50여 명씩 모여 예배하며, 잔칫집처럼 북적대니 아무리 큰살림이라고 한들 보통 일은 아니었다.

시아버지의 강권과 한계에 부딪치니, 아무리 소명이라고 해도 그대로는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매주 화요일에 가정예배를 집에서 드리게 되었다.

변함없이 가정예배가 드려지니, 위로가 필요한 사람, 감사를 나누고 싶은 사람, 그리운 사람들이 다 모였다. 처음에는 가족 중심이었지만 장성한 자녀들이 떠나고 그 자리를 일가 친지와 이웃들이 채웠다.

‘삼성의 별’이 된 남편 강진구 회장

이렇게 가정예배가 드려지는 배경에는 6년 전에 하늘나라로 떠난 남편, 강진구 장로가 있다.

강 장로는 동양방송(TBC) 기술부장 시절, 이병철 회장에게 발탁되어 우리나라 전자산업 초창기에 삼성전자로 옮겨가, 우리나라 반도체 신화를 낳은 인물이다. 그 증거로, ‘삼성전자의 별’이 되어 삼성 창조관 명예의 전당에 유일하게 헌액되어 있다.

침묵을 금으로 알던 강진구 회장도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업적에 대해, “내 힘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이며 아내의 눈물의 기도 덕분이었다”고 고백했다.

“이모는 나의 롤 모델, 나는 그 제자!”

“어린 시절부터 이모님은 제 롤 모델이었어요. 신앙과 지혜와 인품, 섬김과 나눔, 어려운 이웃이나 복음을 위해서는 언제나 손을 펴시는 그 모습, 저는 그런 이모의 제자입니다.” 조카 임명자 권사의 고백이다.

자연스레 화요예배의 성격과 내용도 변모해 가지만, 예배를 거르는 법은 없다. 이제 이곳은 성경에서 만나는 유무상통의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 있다. 김 권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큰 나무로 서서 많은 이들을 깃들이게 하는 넉넉한 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박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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