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명 목사와 동요 이야기

 

특집 : 노래를 만났다

창가, 넘어지다

창가는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제작된 노래를 말한다. 구한말, 개항 이후 학교의 음악교육은 보통 이러한 노래를 배우는 창가 시간이었다. 대체로 한 주에 세 시간으로 구성된 이 수업은 전문적인 음악교사의 지도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틀림없이 어린이들이 노래를 배우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배움과 앎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애국창가를 부르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동요를 부르며 또래와 마음을 나누었으리라.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강제 침탈로 인해 교육계도 판도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서양음악과 근대시, 신체시 등 다양한 장르의 시가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때에 다양성이 사라지고 일제 식민지 정책에 부합하는 교육만 남게 되었다. 일제는 애국창가를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시켰고, 일본식 창가교육만을 정규화했다.

일제의 한국 강제 병탄 이후 비통한 민족 감정이 창가로 표출되어 전국적으로 민중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애국창가는 숨죽여 불러야만 했다. 가사의 내용은 성인들의 노랫말이었지만 어린이들도 곧잘 따라 불렀고,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한용희, <한국동요음악사>, 38-40). 다음은 애국창가 <소년 남자가>의 일부분이다.

무쇠골 격돌 근육 소년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가 다다랐네 / 만인대적 연습하여 우일 공전 세우세 / 절세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미래를 기약하는 소년들이 애국정신으로 훗날 공을 세울 것이라는 희망가. 지금은 암울한 상황이지만 미래는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노래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들은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의해 금지되었고, 일본식 창가만 부르도록 교과서를 만들어 확산해 나아갔다.

강신명과 동요, 대안이 되다

일제의 이러한 만행에 반기를 들며 대안 문화를 모색한 대표적인 보기는 ‘색동회’의 활동이었다. 1923년에 발족한 색동회는 어린이문화단체로 조선 동요운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색동회는 잡지 <어린이>를 출간하였는데, 동시, 동요 등이 수록되었고 여러 공모전을 실시하여 대중들의 작사, 작곡활동과 참여가 활발해졌다. 홍난파, 이은상, 박태준, 한정동 등 한국 음악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이 활동한 때이기도 하다.

1920년대의 운동을 바탕으로 1930년대에는 동요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양과 질에 있어서 큰 진보를 이루었는데, 해방 이후 숭실대학교 이사장,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던 소죽 강신명 목사(1909-1985)가 이 시기 동요의 황금기를 이루어간 중요한 인물이었다.

강신명 목사는 대구 계성학교에서 박태준(동요 <오빠생각>, <오뚝이>, <하얀밤> 작곡가)에게 음악을 배우고, 이후 평양숭실전문학교에서 선교사에게 음악 이론을 배워 동요 작가로 활동하였다. 1932년 <조선중앙일보> 신년현상동요대회에서 1등을 하였으며, 학비 충당을 위해 선교사의 악보 정리와 악보 제작에 참여하였다.

음악,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을 사랑했던 강신명은 <아동가요곡선 300곡>을 편집하여 내는데, 이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취지가 밝혀져 있다.

“일을 필하고 보니 바로 크리스마스이라 야밤 필자 주 곁에 목자가 듣던 천군천사의 노래는 못 들어도 하늘의 천사와도 같이 귀엽고 재롱스런 어린이들의 노래는 오늘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또한 바쳐야 할 노래를 우리가 주어야 하겠습니다. 대개 그들에게는 노래가 끊어진 까닭이외다. 우리는 이 요구에 응하려고 그들이 불러야 할 노래 삼백사십여 곡을 추리어 이 책을 내놓은 것이외다.”

노래가 끊어진 까닭이라니. 일제에 의해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노래할 수 없던 시대의 아픔을 뚫고 나아가고자, 강 목사는 ‘동요’라는 대안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동요집을 내놓으면서 강 목사의 삶에 고난이 찾아왔다. 간접적 독립운동이라는 죄목으로 일제는 강 목사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동요집의 가사가 지나치게 밝고 희망적이어서 독립의식을 고취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죄목이었다.

일제가 이러한 반응을 했다는 것은 강 목사의 동요에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암울한 시대에 어린이들을 밝게 양육하여 세상에 위로를 전하는 것. 어쩌면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직접적으로 고취시키는 내용보다 이러한 동요가 확장되는 힘이 일제를 더 두렵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강 목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4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이 동요집 재판을 발간했다. 동요가 계속해서 위로의 대안이 되도록 말이다.

노래, 위로가 되다

강신명 목사가 지은 동요 중 대표적인 두 곡을 살펴보자.

<보슬비>

보슬비가 보슬보슬 연못물에 나려와서는

둥글둥글 둥그램이를 곱게곱게 그려놓지요

그리면은 없어지고 없어지고 또 그리고

하루종일 보슬비는 연못에서 물작난해요

<눈나리는 밤>

함박눈이 소리없이 나리는 밤엔 / 도라가신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 버선집는 바늘귀 꿰여드리며

옛날얘기 듣든 밤이 생각이 나요

함박눈이 소리없이 나리는 밤엔 / 시집가신 큰언니가 그립습니다 / 수놓은 실 흐큰 걸 가려드리며

재미있게 노래하든 생각이 나요

강신명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요에는 신앙적 색깔을 거의 넣지 않았다. 순수한 동요창작이 주류였다. 동요 창작의 목적이 순수한 동심 함양에 있었고,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조선 어린이들이 부르는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인이 어릴 때부터 순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부르며 민족정서와 동심을 길러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 운동의 진정한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 목사가 책의 서문에서 밝힌 내용을 좀 더 확장해서 상상해 본다. 어린이들은 노래를 부르며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기르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하늘의 천사가 부르는 것처럼 아름답게 듣는 모습. 이 광경을 상상해 보면 노래가 세상을 어떻게 위로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노래가 끊어진 시대에, 동요로 새로운 노래 문화를 펼쳐나간 강신명 목사의 뜻이 오늘, 여기에서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이제 바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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