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의 성장기 ①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인 아버지 테오도르와 어머니 코르넬리아 부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부에게는 고흐보다 한해 먼저 태어났다 죽은 첫 애 ‘빈센트’가 있었다. 고흐는 그 형의 이름으로 산 셈이다. 동네의 묘지에서 자기 이름의 형 무덤을 보며 자란 어린 고흐의 마음이 어땠을까.

네덜란드는 해상무역과 식민지 개척으로 영국ㆍ프랑스와 다툴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으나 고흐의 집은 부요하지 못했다.

그 가운데 고흐는 미술적 재능을 어머니 코르넬리아로부터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틈틈이 야생화를 스케치하여 수채화를 그리곤 했고, 어린 고흐는 자연을 관찰하는 아이였다. 10대 때 마침 미술이 교과과정에 도입되어 고흐가 다니던 빌렘 2세 중학교에 파리에서 낙향한 화가 하위스만스를 만났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고흐에게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고흐는 학교를 못 다니고 이듬해부터 헤이그의 구필화랑에 첫 직장을 얻었다. 화랑 일은 큰아버지 센트의 권유에 의해서인데 그곳은 파리의 화상 아돌프 구필과 센트가 동업하는 화랑으로,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을 파리에 소개하고 판매하는 화랑이었다. 렘브란트와 베르메르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던 프랑스인의 구미에 맞는 사업이었다.

그러던 중 센트는 프랑스의 바르비종파 미술을 접하고 이를 수집해 네덜란드에 팔며 한편으로는 네덜란드에 바르비종파의 화풍을 들여와 화가를 육성하였다. 바르비종파 미술이란 19세기 중반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 마을에서 농촌 생활과 자연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그 작품을 총칭하는 말로, 대표적인 화가는 밀레이다. 고흐가 밀레를 흠모한 계기가 이때 이루어진 듯하다. 이때 고흐의 나이 16세였다.

센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고흐와 테오를 친자식처럼 아꼈고, 만일 고흐가 그 기대에 부응하였다면 그 인생은 안락하고 편안했을지도 모른다.

화랑의 일이 늘 즐겁고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1873년 고흐는 구필화랑 런던지점으로 파견되었다. 증기기관을 기반으로 한 산업혁명의 도시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분주한 도시였다. 이런 도시에서 화랑은 전도가 유망한 밝은 사업이었다. 그러나 런던의 역동성 이면에는 노동자의 비참한 삶이 있었다. 노동자들의 삶을 본 고흐는 큰 충격을 받았다. 훌륭한 화가를 발굴하여 그 작품을 보호하고 가치를 높이는 화랑의 이상과 한 점의 그림을 팔기 위하여 마음에도 없는 말로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화상의 일 사이에서 고흐는 갈등하였다. 자연히 화랑의 손님과 언쟁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이 무렵 하숙집 딸 로예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슬픔도 컸다. 결국 1876년 고흐는 구필화랑에서 해고되었다.

고흐는 이런 현실을 믿음으로 수용하려고 애썼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이요 아픔이다.”

고흐는 형의 이름으로 살았지만 자기 삶을 살아내려고 애썼다.

최광열

미술평론가. 미술에 깃든 이야기를 끄집어내 벗들과 소통하기를 즐겨한다. 그의 담론에는 역사와 종교가 있어 그 재미와 의미가 더 쏠쏠하다. 담을 허물고 경계를 건너 성큼성큼 다가오는 세상을 추구하는 그는 하늘교회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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