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 한정원 지음, 시간의 흐름, 2020년

돌이켜 보면 나와 책 읽기의 인연은 다소 강제적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 그림책을 보면서 한글을 깨우칠 때도, 초등학교 때 위인전을 읽고 독후감을 쓸 때도, 중고등학교 때 시험에 지문으로 자주 나오는 책을 읽을 때도, 대학교 때 미학 관련 책을 읽으며 거창하게 예술을 논할 때도 내가 책 읽기를 절로 즐긴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책 읽기는 즐거운 취미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학생으로서 해야 할 공부의 영역에 가까웠다.

비평가 김현 선생이 쓴 책 <행복한 책읽기>에서 보여주는 독서의 경지가 나는 항상 부러웠다. 그래서일지 나는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서 꼬박 14년을 일했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미술관에서 일하면서도 여전히 책 만드는 일을 간간이 하고, 책 만드는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이렇게 책을 소개하는 글도 오랜 기간 쓰고 있다.

그러니 내게 책 읽기는 일이거나 노동인 셈이다. 나는 사무실에서 새로운 일을 기획하면서 뭔가 방도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일종의 루틴처럼 이런저런 책을 펼쳐보면서 영감을 찾아다닌다. 그래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으면 애써 서점을 찾아간다. 내가 서점을 찾는다는 건 한가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상황이 긴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에서는 아이들 공부를 봐주기도 하는데, 더 잘, 그리고 더 열심히 가르치라고 아이들 엄마가 사다 놓는 여러 관련 도서들이 못다 한 숙제가 되어 점점 더 많이 책상 위에 쌓이고 있다. 이쯤 되면 책 읽기가 아무리 좋다 한들 항상 좋기만 할까? 가수 이문세의 노래 <옛사랑> 가사처럼 사랑마저도 지겨울 때가 있을 텐데, 하물며 책 읽기가 지겨워지지 않을 리가 없다. 나는 할 수 없이 책을 읽는 것일까? 다행히 ‘개미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책 읽기는 일처럼 빡세야 하고, 벽돌 같은 책을 읽어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이런 말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 날도 있는 법이다.

알고 지내는 서점 사장님이 김포 북변동 오래된 동네에서 운영하는 ‘꿈틀책방’에 이어 한강신도시에 새로 생긴 ‘코뿔소책방’까지 인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아무 책이건 한 권을 온전히 읽고 나면 다음으로 읽어야 할 책 혹은 읽고 싶은 책이 자연스럽게, 심지어 기하급수적으로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동네서점에서 정성을 다해 선별하고 추천하는 책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렇게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시와 산책>이다. <시와 산책>은 ‘말들의 흐름’이라는 끝말잇기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이다. 한 사람이 두 개의 낱말을 제시하면, 다음 사람은 앞사람의 두 번째 낱말을 이어받은 뒤, 또 다른 낱말을 새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낱말을 두 작가가 공유하며 책과 책 ‘사이’에 존재하는 책 읽기의 가능성을 독자들과 함께 탐색한다. 살짝 질감이 느껴지는 두꺼운 표지 종이가 가벼운 양장 형태로 제본되어 있고, 영문 글자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림이 되어 버린 듯이 배경을 차지하였으며, 책 제목과 저자 이름은 황금색으로 금박이 되어 있다. 만듦새가 마치 액자에 넣지 않은 판화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손자국이 남을까, 접힌 자국이 생길까 조심, 또 조심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면 타자기로 한 글자 한 글자씩 찍어낸 듯하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 살아 있는 서체와 시적인 글줄을 파란 별색으로 처리한 글자들이 맑고 단정하게 다가온다.

아, 다행이다. 책 읽기가 지겨워질 때는 억지로 읽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림을 보는 대신 읽기도 하는 것처럼, 때로는 책도 읽는 대신 보는 것이구나. 책을 읽지 않았는데도,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다. 조바심을 내지 말고 글은 조금 나중에 읽어도 충분하다. 누군가 그랬지, 모두가 시인이기에 시인이란 건 직업일 수가 없다고. 오늘은 나도 시와 산책이나 해야겠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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