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전선 이상 없다(2022)〉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프란츠 카프카는 하루아침에 벌레로 몸이 바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변신>이라는 소설을 내놓습니다. 황당무계한 거 같지만, 당대 현실을 생각하면 이보다 사실적일 수 없어요. 참호전 속으로 수천만 명의 젊은이들을 몰아넣고, 1,700만 명이나 죽인 전쟁이 바로 1차 세계대전입니다. 병사들을 그저 차갑고 습한 참호 땅바닥을 파고드는 벌레 취급했을 정도로, 전쟁은 인간성 종말의 현장이었습니다.

이런 1차 세계대전의 야만성은 20세기 최고의 반전(反戰)문학 두 작품을 통해 연이어 고발됩니다. 1차 대전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미국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1929년에 각각 발표합니다. 두 작품은 이내 영화화되는데, 특히 어른들의 선동에 현혹되어 참전한 10대 병사들이 비참한 비극을 맞이하는 내용을 건조하게 풀어낸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1930년 제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고, 이후 두 번이나 리메이크됩니다. 그런데 앞선 영화 둘이 모두 미국에서 제작한 거라면,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은 원작의 실제 배경이 되는 독일에서 독일어로 직접 제작한 영화로, 전쟁의 부조리함과 야만성을 극대화해, 넷플릭스 비영어권 작품 중 전 세계 시청 순위 1위에 올랐습니다.

1차 세계대전 말기, 만 17세 독일 소년 파울 보이머와 그의 학교 친구들은 영웅심과 애국심에 사로잡혀 자원입대합니다. 특히 파울은 부모가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분위기에 휩쓸려 부모 대신 서명해 참전합니다. 그 어린 청소년들은 전쟁을 그저 남자다움을 증명하는 낭만의 장 정도로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전방에 배치되는 순간 그 환상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오로지 죽고 죽이는 살육 본능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둘 죽어갑니다.

독일과 프랑스 고위층이 정전 협상하는 장면은 원작엔 없는 걸로, 전쟁의 부당함을 강화하기 위해 이번 작품에 새로 추가된 장면들인데, 병사들은 딱딱한 빵부스러기를 나누어 먹고 흙탕물을 마시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정부 대표단은 안전한 공간에서 호화로운 식사를 합니다. 게다가 전장의 병사들은 생사를 오가는데, 그들을 지휘하는 군 고위층의 입장에서 병사들은 그저 숫자에 불과합니다. 고위 지배계급들이 입으로 전쟁하는 동안, 꽃다운 청춘의 국민들은 죽어 나가고 있는 모습이지요.

지금까지 우린 전쟁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영화들을 무수히 봐왔습니다. 그런데 살인과 죽음이 있는 곳에 낭만이 있을 리 만무하죠. 전쟁이 실시간으로 미디어를 통해 중계되고, 영웅주의 오락물로 소비되는 현실은 전쟁 이상으로 비인간적입니다. 일찍이 수전 손택은 그녀의 저서 <타인의 고통>을 통해, 폭력과 잔혹함의 이미지에 매몰된 현대 사회는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한다고 개탄했습니다. 지구 반대편 우크라이나 땅에서 터진 전쟁도, 중동에서 벌어지는 인종 청소도, 그저 남의 일이요, 수다용 얘기거리일 뿐입니다.

인류는 1,7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전쟁의 기억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 4배 이상의 사망자를 낸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저 부품으로 취급하는 한 그런 일은 끊임없이 반복될 거예요. 주인공 파울은 살려고, 적국 병사를 죽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상황이기에 본능적으로 그런 건데, 그렇게 죽인 병사가 어쩔 수 없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끌려 나온 평범한 인쇄공이자, 누군가의 남편이요, 아빠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절망에 빠져 울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면, 전쟁으로 생명을 내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지난 70여 년간 이 땅에 큰 전쟁이 없었으니, 이 모든 게 남의 일 같나요? 그런데 휴전상태인 이 한반도에서도 생명은 그저 수치로 다루어집니다. 사고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걸 단순히 숫자로 기억하는 것 말입니다. 사람 한 명 한 명을 기억하는 분위기가 그립고 절실한 때입니다.

임택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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