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 유홍준 지음, 창비, 2014년

상사병을 앓은 적이 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은 것도 아닌데 나는 ‘베르테르 신드롬’에 빠진 것처럼 먹지도, 잠들지도, 심지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와 헤어지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도무지 떨칠 수가 없었다. 흔한 애정 싸움 한번 안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지만, 당시 그녀는 여러 가지 일로 지칠 대로 지쳐서 더는 연애를 이어갈 만한 여유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때 내가 그녀를 배려하고 위로한 방식은 대부분 유치했다. 다행히 그녀와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방식만큼은 특별한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적지 않은 난관을 극복하고 지금 나는 그녀와 이별 대신 결혼을 했다.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녀는 듣기에 열중하는 사람인지라 우리는 함께 걸으며 대화하는 시간을 즐겼다. 가끔은 이렇게 걷는 공간이 미술관이나 박물관, 때로는 고궁같은 곳이었다. 함께 갈 장소가 정해지면 나는 이야깃거리를 준비하느라 바빠졌다. 예를 들어,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게 되면 미리 전시 내용을 확인한 다음, 작가와 주제 그리고 관련 있는 흥미로운 사실들을 찾아보았다. 고궁에 갈 때는 개별 공간들의 위치와 역할, 주요 왕들의 행적, 그리고 동서양 정원 디자인의 차이점 등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이런 내용은 내가 대학에서 전공으로 배웠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라 자연스레 내게도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녀에게 멋있는 남자가 된 듯한 기분이 좋았다.

결혼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현재의 내가 잘 먹고, 잘 산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다. 대신 그녀는 함께한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한 탓에 이제는 기운이 다 빠져서 내게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겨를이 없는 것 같다. 지나가는 말로 “결혼하면 특별한 공간에도 자주 가고 새로운 것도 많이 배울 줄 알았어. 그런데 요즘은 통 공부를 안 하나 봐.” 하고 건네는 그녀의 푸념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무안하고 미안한 마음에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어디라도 다녀올까 궁리하였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소는 단연 일본 교토, 그녀와 나의 신혼여행지이다. 보이는 모든 풍경이 이야깃거리가 되는 도시. 이번에는 아이들도 함께 데려갈까? 교토로 신혼여행을 가는 부부는 처음 본다는 여행사 직원의 의아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지만, 지금 보니 교토가 몰디브나 유럽 일주처럼 거창한 여행지가 아닌지라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덜 부담스럽다는 게 새삼 다행스럽다.

교토 관련 여행서는 많다. 유명 관광지를 안내하는 책이 좋을까? 아니면 멋진 숙소에 머물면서 지역별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즐비한 거리를 돌아보는 책은 어떨까? 아무래도 내게는 공부가 여행이 되고, 여행이 공부가 되는 책이 필요하다. 1993년 제1권 ‘남도답사 일번지’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답사 여행의 출발을 알린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일본으로까지 영역을 넓혀 놓아 마음이 놓인다. 교토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의 흔적을 통해 우리나라 고대사의 풍경을 가늠할 수 있으며, 일본의 문화 유전자 지도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문화란 어느 일방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꽃피는 것이란 깨달음은 우리네 결혼 생활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그녀가 내게 바라는 것들이란 게 이제 와서 갑자기 거창해지거나 화려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이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고 불완전하다는 걸 나보다도 먼저 눈치챘는지 모른다. 하여, 그런 그녀라면 내가 교토에서 늘어놓는 이야기가 아무리 소소할지언정 오래전 그때처럼 맘씨 좋은 얼굴로 귀 기울여주리라 믿고 있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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