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이지선 작가가 들려주는 위로와 응원 〈꽤 괜찮은 해피엔딩〉

 

화상으로 인해 변한 삶

23살 대학교 4학년 여름, 오빠와 함께 집에 오던 길 음주운전자로 인해 사고가 났다. 차에 난 불은 상반신에 금세 옮아 붙었다. 오빠가 양 팔을 데어가며 급히 구했지만 전신 55퍼센트에 3도의 중화상을 입고 말았고, 그로 인해 산다는 것은 너무나 아득한 일이 되고 말았다. 당연했던 모든 일상이 더 이상은 당연하지 않게 된 것.

그러나 그 아득해 보이기만 하던 고개를 한 고개씩 넘어갔다. 때로는 절망이란 이름으로, 때로는 포기란 이름으로 자신을 속이려 하는 호랑이들이 고개마다 나타났지만 그녀는 이기고 고개를 넘었다. 고개를 넘고 넘어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에게로 씩씩하게 걸어왔다.

책 <지선아 사랑해>로 40만 독자에게 희망을 전한 이지선 작가(사진). 사고를 당했을 때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아복지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그가, 미국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학 석사학위를,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현재 한동대학교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40번이 넘는 피부이식수술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걸어온 것.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지선아 사랑해> 이후의 이야기를 솔직하고도 담백하게 실어낸 <꽤 괜찮은 해피엔딩>(문학동네)을 들고 찾아왔다.

‘살아남았다. 그래서 슬펐던 날도 있었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았던 날도 있었다. 인생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깜깜해지는 동굴같이 막막하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그러나 그때마다 들려온 “여기가 끝이 아니야”라는 작은 소리, 그리고 나 자신을 부정하고 싶던 시간에도 내 곁을 지켜준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깜깜한 동굴에서 멈추어 서지 않고 매일 하루씩만큼을 걸어 나와 이제 “인생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라고 말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 항상 괜찮았던 것이 아니라 ‘매일 하루씩만큼’ 힘을 내며 살아냈던 것. 그에게 ‘다시’ 힘을 내 살게 했던 것이다. ‘다시’의 동인(動因)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살게 한 사람들

“사고가 난 후 살고 싶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지요. 그때 엄마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안 먹겠다고 밥을 거부하던 저에게 엄마는 기도하면서 씩씩하게 먹이셨어요. ‘에스겔 골짜기 마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살리시고 군대가 되게 하신 하나님, 이 밥이 지선이의 살이 되고 가죽이 되게 해 주세요’ 아, 엄마를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 싶었지요.”

지금도 사고가 난 날이면 두 번째 생일이라며 선물을 하고 편지를 보내주는 오빠도 ‘다시’ 살게 한 이였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곁을 든든히 지켜준 오빠를 사고 후 한참은 ‘오까’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당겨진 피부로 입술이 붙지 않아 발음이 되지 않았던 것. 나중에 오까가 일본어로 ‘언덕’이라는 뜻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언덕이 되어주었던 오빠에게 딱 맞는 호칭이었다.

병실에서 맞을 수밖에 없었던 크리스마스. 교회 식구들과 학교 친구들이, 오래전 연락이 끊겼던 초중고 동창들, 교수님들과 선생님들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잔뜩 보내주었다. 카드 가득 적힌 격려의 말들,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였다. 제 손으로 종이 한 장조차 잡을 수 없었던 시기라 가족들이 카드를 한 장 한 장 읽어주었다.

“넌 혼자가 아니야. 지금 옆에 있지는 못하지만, 마음은 지금 네 옆에 있어.”

때로 얼굴을 보고 놀라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지선아, 사랑해> 출간 이후에는 정말 많은 이들의 뜨거운 사랑과 격려를 받았다고. 마치 뉴욕에서 출전한 생애 첫 마라톤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던 순간 자신의 일같이 기뻐하며 격려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내게는 기꺼이 나를 일으켜주고 싶다며 다가온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일어나자고 가족이, 친구가, 학교가, 교회가 손을 내밀어주었다. 무엇이 필요하냐고, 자신이 무엇을 도울 수 있겠냐고 진심으로 물어봐주고 내 작은 목소리에 귀기울여줬다. 때론 굳이 말하기도 전에 먼저 나를 당겨 올려주기도, 업어주기도 했다.’

‘다시’ 산 이유를 알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한테 따지러 엄마 교회 좀 가자고 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나조차도 나를 사랑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딸이라 부르셨다. 그리고는 “너를 세상 가운데 반드시 다시 세울 것이고 병들고 약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네가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할 거야” 하시며 “절대 끝이 아니다, 내가 준비한 해피엔딩이 있단다” 약속하셨다.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다시 산 것이며, 어떤 사명을 감당하며 살 것인지.

‘다시’ 사람들을 향해

“그 깨달음 끝에 마음에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이제 네가 넘어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면 어떻겠니? 여기 내밀어줄 손이 필요하다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되면 어떻겠니? 저는 누군가에게 손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공부를 시작한 거예요.”

재활상담을 공부한 이유도, 좀 더 제도적으로 장애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전공을 사회복지학으로 바꾼 것도, 지금도 장애인 인식 개선을 위해 열리는 자리에는 되도록 꼭 참석해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모두 같은 이유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이라는 라벨을 붙이기 이전에 장애인을 한 사람으로 바라봐줬으면 한다. 장애라는 몸의 어떤 부분에 생긴 손상을, 그로 인해 어떤 것을 할 수 없게 된 상태를 그 사람 전체의 손상이나 무능력함으로 확대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교수가 요즘 대학 밖에서 만나 손을 내민 아이들도 재소자 부모를 둔 자녀들이다. 세움이란 단체를 통해 만난 아이들에게,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낙인과 여러 어려움으로 움츠러든 그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 예전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저는 큰일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그저 제 작은 손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시간과 마음을 내어 줄 수 있기를, 그래서 그들의 세상이 조금만 더 밝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내린 정의, 다시 쓰기

<꽤 괜찮은 해피엔딩>에서 이지선 작가는 사고와 헤어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상을 담담하게 그렸다. 힘든 시기에도 그를 지탱해준 건 글쓰기였다. ‘다시 쓰기’(rewriting). 덕분에 미움과 원망에 휩쓸리지 않고 희망과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해, 일어났던 그 나쁜 일에 대해, 내가 그리는 나의 미래에 대해 다시 쓰는 것이다.…회복을 넘어 성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내가 누군지 정의하는 그 다시 쓰기가 필요했다. 나는 사고를 당한 사람인가. 사고를 만났지만 사고와 헤어진 사람인가. 사고와 헤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은 더뎠으며 몸이 아픈 만큼 마음도 많이 아팠지만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내듯 헤어졌다.…나는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고를 ‘당한’ 사람으로만 남겨두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하는 딸’이라 부르셨습니다. 제가 발견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게 ‘다시 쓰기’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불러주시고,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시고, 재 대신 화관을 씌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깨어진 그릇이 아니라 빛을 담은 그릇으로 부르십니다. 나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다시 쓰시는 것으로 나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나를 정의하시는 것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는 거듭 강조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동굴 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도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 같이 힘내자’고.

이경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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