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공간>, 유현준 지음, 을유문화사, 2020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집을 짓기로 했다. 요즘 같은 아파트 시세에는 구입 가능한 집도 없을뿐더러 식구들을 거느리고 계속 이사만 다닐 수도 없었다. 다행히 집 지을 땅이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일단 집을 짓는 것으로 결정하고 나니 나는 자연스레 ‘건축주’라는 지위를 획득하였다. 중요한 가정사는 당연히 남자가 책임져야 한다고 몰아가는 우리 집의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다소 부담스럽다. 식구들의 요구사항이 하나둘 나에게 몰려들었다. 일터에서 ‘네, 네, 고객님~. 고객님의 요구사항은 항상 옳고말고요.’라고 되뇌며 일하는 내게 갑자기 가족 내 고객님들이 여럿 등장한 형국이다.

장모님은 애지중지하는 12자 자개장을 포기하실 수 없으니 안방의 크기가 장의 크기에 맞아야 한다.

냄새에 민감하여 한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하는 처제의 방은 창을 크게 낸 다음 볕이 잘 드는 방향으로 배치해야 한다.

어릴 때 읽었던 그림책부터 요즘 즐겨 읽는 SF 소설까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부터 요즘도 만들곤 하는 레고 블록들까지 모두 추억이 담긴 것인지라 절대 버릴 수 없다는 아이들의 낭만적 감성에 생채기를 내지 않으려면 벽면 가득 장식장 용도까지 겸하는 책장을 짜 맞추어야 한다. 적잖이 부담감을 느끼는 내 마음을 눈치 챈 각시는 개수대에 ‘딱’ 맞추어 작은 창문을 내고, 주방 시설이 끝나는 부분에 ‘딱’ 맞추어 외부 출입문만 만들어 주면 더 이상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선심을 쓴다.

<공간이 만든 공간>을 쓴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환경의 제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인간 지능의 노력이 ‘건축물’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난다. 비가 와서 지붕을 만들었고, 추우니까 벽으로 방을 만들고 온돌을 만들었다. 건축은 기후가 주는 문제에 대한 인간의 물리적 해결책이다.”라고 건축을 정의하는데, 살면서 식구들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지 않으려면 지금 내게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노력 혹은 변명이 필요하다.

“하나, 둘, 마이크 시험 중~. 친애하는 가족 여러분, 단언컨대 정말 이렇게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집은 무려 세 가구가 모여서 만들어진 대가족입니다. 몇 년 전에 왕할머니가 돌아가시며 식구 수가 줄었다지만 대신 아이들 덩치가 커졌지 않습니까? 그러니 작더라도 방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럼 집을 크게 지으면 되지 않냐고요? 네, 저도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숲을 끼고 있는 땅인지라 용적률(대지 면적에 대한 건물 연면적의 비율)이 크지 않아서 이 정도가 최선입니다. 여러분도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좋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게 세상 섭리지요. 게다가 여유 자금을 고려하면 애초에 더 크게 지을 수도 없었습니다.

행여, 제가 식구 많은 것을 탓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 덕분에 밖에서 마음 편히 일할 수 있고, 아이들도 잘 크고 있고, 매 끼니 밥도 잘 먹고 있는지라 저는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들 나이가 더 들 텐데, 서로 의지하고 도우려면 어차피 모여 살아야 하고 말이지요.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건축주로서 저는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제약 속에서도 가족 여러분의 요구사항을 최대한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궁금한 분은 한국판 <총·균·쇠>로 불리기도 하고 유발 하라리가 쓴 건축 책 같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이 책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주어진 환경이라는 공간이 결국 결과물로서의 건축 공간을 만들어낸다.’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시면 입주 후에 조금 실망스럽고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건축주로서의 제 고뇌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이 거창하고 구구절절한 목소리로 일단 한숨은 돌렸지만 나는 오늘도 계약 만기 날까지 과연 이사할 집이 지어질 수는 있을지 불안 불안하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