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권서 이성환

대한성서공회가 펴낸 <대한성서공회사>에는 성경이 이 땅에 전해진 경위, 즉 번역과 전파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과정을 따라 가보면 그 일을 위해 애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해, 그 해부터 약 10년간 강화도에서 권서로 활동한 이성환의 이야기다. 그는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척양(斥洋, 서양을 배척함) 사상이 팽배해 있어서 서양인들에 대한 감정이 곱지 않았다. 특히 강화도는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미국이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한 사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땅이라 외세에 대한 배척이 극심한 곳이었다.

미국인 선교사 죤스는 1888년에 강화도 선교를 하려 했으나 주민들로부터 거절당했는데, 이전에 피해를 주었던 오랑캐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때 주막을 운영하던 이성환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고, 노모까지 전도하게 된다.

기독교로 입교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얼마나 효심이 지극한지 그는 어머니보다 먼저 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선교사를 초청하여 어머니부터 세례를 받게 하려 하였으나 문제가 생겼다. 마을 청년들이 곡괭이와 낫을 들고 서양 사람이 강화 땅에 발 들이는 것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모시고 세례를 받을 수 있을지 기도하며 고민했다. 그리고는 묘수를 떠올렸다. 선교사가 그 땅을 밟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그는 밤을 틈타 노모를 엎고, 쪽배를 얻어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선교사를 그 배 위로 모셔서 ‘선상 세례’를 받는다. 서양 선교사들이 강화 땅을 밟지 않았으니 문제될 일이 없었고, 어머니는 무사히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선상 세례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강화 선교의 매우 독특한 역사로 남게 된다.

이후 이성환은 권서로 활동한다. 주막 주인이 복음 전도자가 된 것이다. 1894년부터 약 10여 년간 성경을 권하고 팔면서 강화 전도의 개척자가 되었다. 어떤 때는 돌을 맞고 강도를 만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서양 것을 전한다고 눈치를 받기도 했으나 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02년에는 12개 교회, 500명 이상의 사람이 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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