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하심에 감사

장려상 - 윤호용

코로나로 억눌렸던 알래스카 관광이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했던 여름, 주일의 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와서 쉬고 있는데 캘거리의 한 목회자로부터 메일이 왔습니다. 급하게 통화하고 싶다는 내용에 연락해보니 캄보디아에서 사역하시는 김창영 선교사님의 첫째 아들 김성수 형제가 알래스카에 선교팀 스태프로 봉사를 왔다가 코로나에 걸렸고, 폐렴까지 갔는데도 병원에서 집에 있으라고 해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전화였습니다.

주소를 받고 보니 제가 살고 있는 앵커리지에서 차로 2시간 30분 떨어진 솔닷나라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그 아버지 선교사님은 염치불문하고 아들에게 김치찌개와 동치미, 생선 등 여러가지 음식과 민간요법으로 폐를 치료하는데 필요한 강황 가루 등을 요청하였습니다.

손님이 와 있었지만 밤새 고민 끝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수 형제가 작은 아들과 같은 나이이고, 우리 가족은 이미 9년 전에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경험한 터라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김치찌개를 끓이고 소불고기와 돼지 불고기, 각종 반찬과 강황 캡슐, 강황 가루, 강황 젤리 등을 잔뜩 준비해 달려가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또 동행한 아내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뽑혔을까?”

잘 모르지만 그래도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미루지 않고 갈 것 같아서 맡기시지 않았나 생각하니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내 자식이라 생각하면 먼 길을 마다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솔닷나에 가서 성수 형제를 만나보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어제보다 더 좋아졌다고 하니 기뻤습니다. 왕복 6시간을 운전하면서도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기뻤습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일에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김창영 선교사님께서 카톡으로 보내온 “생면부지의 목사님께 저희들이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심려를 끼쳐 드려 너무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저희 마음 헤아려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섬김 기억해 주시길 원하고 저희도 선교지에서 갚으며 살아가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고, 지난 주 설교인 “삶으로 보여주라”가 생각났습니다. 제 설교가 입술로만 외치는 허공의 메아리가 아니라 작은 실천으로 열매 맺음에 감사했습니다.

성수 형제는 몸이 좀 좋아져서 목요일 밤에 워싱턴 DC로 돌아갔습니다. 김창영 선교사님은 가난한 선교사의 삶을 함께 경험하며 “절대로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하던 아들이 이번 일이 터닝 포인트가 되어 신학교를 가겠다고 고백하였다며,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해 주심에 감사를 전해왔습니다.

"그럼에도 감사"

장려상 - 이재연

코로나 19는 작은 개척교회에게 직격탄이었다. 감사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마음이 아프다. 코로나로 교회에 모이지 못하면서 재정이 점점 어려워지더니, 사택 없이 교회 안에서 주식을 해결해야 했다. 담임목사인 남편은 야간 경비와 분리 수거요원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젊었을 때 피아니스트가 되어 멋진 공연을 할 것이라 꿈꾸며 살았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목회자 남편을 만나 사모로서 그림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그 와중에 코로나 팬데믹은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삶의 무게로 인해 힘들어도 어디에 가서 말도 할 수 없고, 아파도 숨죽여가며,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면서 생업전선에 뛰어든 나는, 결혼 전에 피아노학원 강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경험을 살려 일을 찾아보았지만, 코로나 시국에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삶의 힘이 되어주던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눈물만 자꾸 흘리며 나날이 무기력해져만 갔다.

홀로 남겨진 아버지는 약간의 치매 증상이 있어서 걱정이 되었는데, 오히려 딸인 나의 경제적인 처지와 건강상태를 염려해 주셨다. 아버지는 밤낮으로 나의 곁을 지켜주시면서 설거지, 빨래 널기 등을 함께 도와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건물에 붙어 있는 환경미화원 채용공고를 보시고 함께 일을 시작하자고 권유하셨다. 그러나 창피하고 부끄러워하기 싫다며 안 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시 마음잡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기운을 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랬더니 진짜 힘이 나고 내가 사는 건물이니 내 집처럼 청결하게 하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이런 마음을 주신 것이 감사했다.

한편 성도님 권유로 요양돌봄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시니, 앞으로 집에서 요양하실 수도 있다고 하였다. 몸과 마음이 불편하신데도 늘 사랑을 베풀어주신 아버지께 이제는 보답해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합격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엄마를 보내면서 아픈 환자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병실에서 최선을 다해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다.

자녀의 대학 등록금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때 한 집사님께서 귀한 등록금을 보내주셨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손길로 채워진 것이다. 결코 넉넉하지 않으신 분이신데, 꼭 학비에 보태라고 하시며 격려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다.

“어둡고 길게만 느껴지는 코로나 터널, 지나는 것이 힘들지만 견디고 버틸 수 있는 힘은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나눔이 있어서 오늘도 살아낼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코로나로 자가 격리하며

장려상-신용철

코로나 확진을 받은 후 자가 격리에 들어갔습니다. 저 때문에 함께 격리된 가족들에게는 미안했습니다. 처음 2~3일은 경황이 없었습니다. 계획하던 모든 일이 갑자기 멈춰버렸습니다. 마치 사고 난 자동차처럼 삶이 무작정 정지하는 바람에 죽음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뜬금없이 찾아올지 모를 죽음에 진짜 대비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격리 4, 5일이 되자, 아무 의욕이 없어졌습니다. 누구는 영화를 본다는데, 영화 리뷰 몇 개 끄적이다가 껐습니다. 좋아하는 성경 말씀도 흥미 없어졌습니다. 심리적 격리가 된 것일까~! 그냥 낮잠만 무한정 잤습니다. 머리가 아팠습니다.

다른 가족에게 전염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큰 아들은 심장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 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습니다. 최대한 내 흔적을 말끔히 청소하고 지웠습니다. 그렇게 말도, 얼굴도 마주치면 안 되는 날이 계속되며 고통은 더해갔습니다. 감옥에서는 1년, 10년, 20년 이런 생활을 어떻게 할까요.

2주 넘게 격리가 지속되자 가족에게 말 걸지 못하고 포옹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 5살 먹은 딸이 저를 보면 토끼처럼 뛰면서 아빠! 아빠! 하고 외칩니다. 토끼 같은 딸을 뽀뽀하고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도망가야 했습니다. 우는 딸을 뒤로하며 문을 닫았습니다. 어쩌다 하트를 그려주면 딸은 더 좋다고 펄쩍 펄쩍 뛰면서 아빠를 외칩니다. 도망치기를 반복하는데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안아주고 싶은데 안지 못하는 병! 예쁘다 말하고 싶은 데 말할 수 없는 병!

한 번은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여보! 너무 힘들어!” 하면서 안기었습니다. “안 돼!” 손사래 치며 물러났습니다. 아내도 ‘아차!’ 하면서 뒤로 물러섰습니다. 힘들 때 안을 수 없다는 것, 아내를 안고 잠자던 그 평안함과 행복이 많이 그리웠습니다. 골방에 들어와 누웠습니다. 자정이 되어도 눈이 멀뚱멀뚱합니다. 4자녀와 아내를 안고 잠자던 일이 우주의 일처럼 그리워졌습니다. 잔소리 많은 아내, 짐 같은 자식들이라 여겼는데, 그동안 얼마나 큰 사랑과 축복을 받았는지 깨달았습니다. 한밤중, 잠든 아이들을 찾아가 안아주고 쓰다듬으며 기도하던 그 기억! 이마에 키스하며 하루의 잘못을 용서하던 그 순간! 창문을 활짝 열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병이 지나면 안기고 싶습니다. 안아주고 싶습니다. 예수 사랑으로 포옹하고 포옹 받는 인생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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