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는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 어디 해녀뿐이랴, 청춘으로 벌어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박한 삶의 이야기는 늘 아련하고 안쓰럽다. 그 긴 세월을 벌어먹고 살아가느라 별 볼일 없는 우리 삶에 비밀이 생긴다.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다. 그중 가장 비밀이 많은 데가 가족이다. 가족은 결코 발설할 수 없는 기막힌 사연의 저장소이고, 한번 쏟아지기 시작하면 온 가족이 통곡을 하기도 한다. 숨이 넘어가도록 울만한 사건은 가족 모두가 공유한다. 그러나 가족이라도 자신의 젖은 베개만이 알고 있는 사연들은 각자의 몫이다. 간혹 무덤까지 가져가게 되는 비밀도 있다. 비극적인 가족의 죽음이나, 말할 수 없는 가족 내 폭력, 가족이 당한 수치의 경험들은 알면서도 온 가족이 침묵하며, 그 침묵은 가족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재갈이 된다.

지켜야 할 것도 많고, 마음이 헤픈 우리들은 몇 번이고 이 비밀이 폭발물이라도 되는 양 내놓을까 말까를 고민한다. 친구의 비밀, 배우자의 비밀, 자식의 비밀, 그리고 때로는 부모의 비밀을 끌어안고 꿈으로만 되새긴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지켜지는 비밀은 자신에 대한 비밀이다. 여러분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가?

아버지의 비밀, 나의 비밀

구순이 훌쩍 넘으신 아버지도 한국전 때 있었던 이야기들 중 8개월 정도는 마치 없던 시절처럼 말씀을 아끼신다. 뭘까 궁금해 집요하게 물어볼 만도 하지만, 나는 묻지 않는다. 나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 몇 년의 세월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밀은 냄새가 있어서 자주 자신의 존재를 흘린다. 그러나 냄새가 난다고 실체를 모두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낫다 싶으면 이 비밀은 결국 우주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버지의 비밀은 사라지고, 나의 비밀 역시 그러할 것이다. 가끔 나이 들어 간직한 비밀은 생애 뇌관과 같은 경우가 많다. 비밀의 존재가 드러나자마자 바로 산화된 폭발물처럼 모든 것을 뜨겁게, 고통스럽게 하다가 완벽히 차갑게 모든 것을 식혀버린다. 아버지는 그게 두려우실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다.

절제와 더불어 생명력 얻는 ‘비밀’

자녀들이 늙어가는 부모에게 감추는 것들은 더 많다. 자신의 삶의 고통을 부모가 알 길 없다. 달라진 세상 속에 무지해져버린 부모들에게는 긴 설명과 논리적 해석도 비밀이다. 또 자식에게 온 죽음의 그림자도 부모에게는 비밀이다.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딸을 보고도 생계를 걱정하는 어머니는 딸의 비밀을 다른 고통으로 미루고 있다.

가족 비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수치심이 눌러놓은 가족의 비밀과 깊은 사랑이 물려놓은 재갈로 시작된 가족비밀이다. 수치심으로부터 온 가족 비밀은 대화를 앗아가고 마음에 깊은 고통의 앙금을 남기며 감정은 곧 엉뚱한 분노로 돌변하기도 한다. 반면 사랑의 재갈로 지켜지는 가족비밀은 말에 온도를 올리고 안쓰럽게 머리를 쓰다듬게 한다. 더하지 못한 것이, 더 돌보지 못한 것이 미안한, 이른바 성숙한 죄책을 갖게 한다.

그때를 기다려보자

정도는 달라도 비극적 가족 비밀은 어느 집에나 있다. 그러나 걱정 말라. 비극적 가족비밀과 사랑의 가족비밀은 매우 호환적이고, 수치는 인내로 발효되어 사랑으로 가기 일쑤다. 분명한 것은 수치의 기억보다 사랑의 비밀이 크거나 같다면 그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늙을수록 사랑의 비밀을 더 많이 가질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니 수치가 사랑으로 변하여 사랑의 재갈을 풀어도 되는 늙음의 자리가 오기를 기다리자. 그때의 비밀 누설과 봉인 해제의 주인은 이미 충분히 성숙해진 당신일 테니 말이다. 온 가족이 심리 해방을 맞을 그때를 위해, 숙성된 당신의 품을, 더 넓어질 그때를 기다려보자. 수치의 비밀이 결국 사랑의 비밀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비밀을 풀어주기 바란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어 온 가족이 추억과 위로로 먹고 마시게 될 것이다.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이자 한국노인상담센터장. 상담전문가이자 부모교육전문가로 활동중이며 나이들어가며 필요한 것들과 어른의 역할에 대한 글을 주로 쓴다. <나이들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법> <가족습관> 등을 썼으며 <이호선의 나이들수록>을 글로 쓰고 영상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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