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이 변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피자와 콜라가 싫어지고, ‘고기주의자’인 내 눈에 생선이 들어온다. 고기뷔페에서 일어설 줄 몰랐던 내가 요즘은 한식집에 간다. 백반을 주문해놓고 내가 이럴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친구와 돌림노래처럼 한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친구도 그렇단다. 입맛이 변하니 친해지는 식당주인도 달라진다. 최근에 이태원 쪽에 새로이 알게 된 구멍가게만한 식당 주인과 이젠 제법 날씨 이야기도 주고받는다. 세상이 변한다지만, 내 혀도 변한다.

변화를 지나 적응에 이르는

변화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달라지는 일이고, 새로운 것이고, 놀랄 일이고, 과거가 부끄러워지는 일이다. 큰소리 뻥뻥 치며 이것이 참이라고 소리 높였던 지난 일들이 떠올라 길을 걸어가다가도 움찔거려 걸음을 멈춰 서곤 한다. 누구나 과거는 부끄럽고 미래는 두렵다지만, 남의 과거야 어찌되었건 간에 내 과거는 늘 현재의 나를 찌른다. 자주 뜨끔거린다. ‘변화의 언덕’을 넘으면 반드시 ‘적응의 저수지’를 만난다. 삶에서 적응이라면 전에 엄두도 못 냈던 일들이 기꺼이 손에 쥐어볼만한 일이 되는 과정이고, 싫어했던 것마저 끌어안을 수 있는 공간이 늘어가는 일이다. 낯설었던 것이 일상이 되고, 서툴던 것이 사뭇 자연스러워지고 심지어 지겨워지는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변화를 지나 적응에 이르는 순례 과정이다.

삶이 고마운 건, 아직도 피자와 콜라를 먹기 때문이다. 고기도 먹고 생선도 먹는다. 소화 능력의 문제도 있고, 맛집인 고기 집에 줄 서면 성질이 나는 성질머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과거의 수치와 죄책의 기억 때문에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취향 바구니’가 커진다는 것이고, 마음 평수가 넓어진다는 것이며, 선택 지렛대 기준을 바꿀 수 있다는 경험을 누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건 괜찮다.

옛날 성질머리 같았으면, 이래서 싫고 저래서 별로고, 이 집은 절대 가면 안 되며, 저 사람은 나랑 안 맞는 사람이니 다음 생애도 안 보겠노라고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단언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안 그런다. 아니 못 그런다. 싫다 좋다가 변하는 것임을 알고, 안 되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도 배웠기 때문이다. 안 맞는 사람과 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지금 삶으로 겪어내고 있고, 목소리에 힘이 빠져 노래 한 곡만 불러도 쉬기 일쑤이니, 안 그런 게 아니라 못 그런다.

‘안’그런 게 아니라 ‘못’그래서 다행이다. ‘못’그러니 다른 이들을 함부로 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쉽사리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나마 힘 빠진 나의 위신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잘’나지 않고 ‘못’나서 다행이다.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으니 구설에 오를 필요 없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주 배경이 되어주니 친구가 많아져서 좋다. 진작 이럴 걸 싶지만, 못난이 젊은 과거가 나이든 나의 현재를 지탱해주며 거름이 되어주었으니, 그때의 그 말과 그 행동마저 좋고 고맙다.

변화하고 적응해가니, 이제야 알겠다. 나의 변화를 지켜봐 준 나의 부모가 얼마나 나를 참아주었는지,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얼마나 나를 견뎌주었는지, 이 못난이를 가족의 이름으로, 친구의 이름으로 사랑해주었는지를 알겠다. 너무 심하게 희생해주지 않은 것도 고맙다. 돌아보니 사랑이고 우리는 갚을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을 받았다.

가을사랑 하세요

그러니 오늘은 전화 한 통 하자. 피자 한 판과 콜라 한 통 들고 친구들을 소집하자. 멀리 있는 친구에게는 하트 이모티콘 하나 쏘며 안부도 묻고 추억도 들추어내 고맙다 말해보자. 채 떨어지지 않는 입이지만, 가족들에게도 통닭 먹고 싶냐고 물어보자. 가장 고마운 가족에게 닭다리를 권해보자. 나를 위해 걸어주고 뛰어준 세상의 모든 다리 중에 내가 주기 가장 쉬운 다리가 닭다리니, 오늘 내 다리 대신 닭다리를 권해보자. 그렇게 지금까지 변화하고 적응하며 한없이 모자랐던 나를 위해 기꺼이 배경이 되어주었던 내 사람들에게 내 사랑을 전해보자. 이번 가을에 아주 제대로 러브해보자! 사랑으로 성장한 나라는 나무의 열매를 나누어보자. 그렇게 가을사랑을 해보자.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이자 한국노인상담센터장. 상담전문가이자 부모교육전문가로 활동중이며 나이들어가며 필요한 것들과 어른의 역할에 대한 글을 주로 쓴다. <나이들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법> <가족습관> 등을 썼으며 <이호선의 나이들수록>을 글로 쓰고 영상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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