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마루에 있던 양쪽 문이 열리는 흑백티비는 동네 2대뿐인 권력물체였다. 안테나를 조정해가며 지지직거리는 방송을 한 번만 보자며 친구들이 들고 온 옥수수와 감자 덕에 우리 집은 사시사철 풍성했다. 얼마 후 유선전화가 일반화되더니 어느새 흑백티비는 색을 뒤집어쓰고 우리 집 안방에는 14인치 칼라티비가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1980년에 시작된 칼라티비의 시대가 벌써 40년이 넘었다. 흑백티비도 없는 사람들이 많던 그 시대 칼라티비가 주는 상대적 박탈감을 고려해 칼라티비 보급은 생산과 수출에 비해 꽤 늦어졌다.

칼라의 시대
칼라의 시대가 시작되고 나서, 인생도 칼라풀 해졌다. 우리의 칼라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찬란한 시절은 화려해졌다. 사람들은 배우들의 푸른 눈화장과 붉은 입술을 보고 화장품을 구입했고, 멋진 남성의 깃 세운 푸른 양복에 열광했다. 그렇게 티비가 일상의 색을 닮기 시작하고, 다시 일상은 티비를 통해 색을 재구성했다.
시선을 끌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판매로 이어지면서 색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빼앗는 마법의 셀로판지가 되었고, 매력적인 사람의 매혹적인 색깔 옷은 이내 너나 할 것 없이 입어야 하는 필수템이 되었다. 일상의 딸기보다 더 빨간 딸기를 티비에서 보고, 이 색을 기준으로 시장의 딸기색이 달라졌다. 드라마에 빨간 스포츠카가 나오더니 검은 세단 일색이던 도로에 색이 입혀졌다. 세월이 지나며 현실과 티비 속 화면이 거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기술력이 좋아졌다. 그렇게 티비에서 보았던 그 색이 더 높은 화소로 실재보다 선명해지는 동안,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며 ‘생애 화소’는 더 낮아졌고 흐려졌다.

티비 시대의 끝이 보인다
우리 시대의 막처럼 베이비붐세대들과 X세대들이 즐겨보며 청춘의 색을 닮아갔던 티비 시대의 막이 내리고 있다. 같이 시작하여 같이 늙어가니 외롭지는 않다만, 내 삶이 아쉽듯 티비의 내리막 역시 아쉽다. 익숙함인지 아쉬움인지 모르겠으나 스마트폰세상에도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면 어김없이 티비를 틀어 뉴스를 본다. 이상하게도 뉴스와 드라마는 티비로 봐야 제 맛이다. 오랜 습관이기도 하고, 동시에 안 좋아지는 눈을 굳이 부릅뜨지 않아도 티비는 우리에게는 돋보기 없이 볼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이리라.
우리도 안다. 오색 찬연한 꽃색의 향연이 지나고 푸름이 무성한 여름을 맞고, 가을 색을 지나 흰색으로 뒤덮이는 시기도 오는 것이 계절의 이치이다. 젊음 그 푸르름의 색 때문인지 파란색이 그렇게 시원하게 보이던 청춘이 지나니, 점점 노랗고 붉은 것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노랑, 부드러움과 친근함, 긍정적인 느낌과 활동성을 주는 색이 점점 좋아진단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좋아진다기보다는 먼저 보이고, 자꾸 손이 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푸르스름한 색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활동성이 낮은 색이고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색이었다. 하긴 이젠 청록이나 파랑, 남색은 구분도 잘 가지 않는다. 알게 뭐람, 좋아하는 색을 골라 입고 다니면 그만이지! 나이가 들며 모두 약속이라도 하듯 삶의 색을 과감하게 입기 시작했다.

그래, 칼라풀한 우리야
그래서 그런가 나이 들어 친구들끼리 모이면 그야말로 총 천연색이다. 빨강, 노랑, 주황 등 붉은 계통 일색이라 이 모임을 보면 꽃동산이고 저 그룹을 보면 꽃대궐이다. 그저 시력문제로만 보자면, 퇴화에 따른 황체변성으로 생겨난 불가피한 결과겠지만, 인생은 늘 진단과 처방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상도 병명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니 의료해석은 그만두자. 다만 자부하건데, 쥐뿔도 없지만 낭만과 해석으로 가득한 티비 로맨스로 한세월을 살았다. 그러니 우리의 알록달록은 생의 봄날에 대한 노스텔지어이자, 생애를 바라보는 마음색의 반영이라고 선언하겠다. 단언컨대 집단 예술체라 하겠다.
모여 있는 이들이 알록달록하다면 티비세대가 맞다. 앞으로도 티비를 부여잡고 잠들 이 세대의 칼라풀한 일상은 다음세대에게는 ‘걸어다니는 레트로’가 될 것이다. 저물어가는 티비 대신, 티비세대가 현실로 튀어나와 길을 걸어간다. 칼라로 용기와 자존감을 장착한 늙은 예술가들이 마치 메타버스 가상현실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길을 걸어간다. 흑백을 넘어 칼라로, 칼라를 넘어 가장 칼라풀한 삶으로 이어지는 이 인생들의 예술 행보에 이의 있는 사람 있나? 있다면 나와 봐라! 색으로 오래 살아온 예술적 우리이기에 모든 질문과 논쟁에 기꺼이 응대할 자신이 있으니!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이자 한국노인상담센터장. 상담전문가이자 부모교육전문가로 활동중이며 나이들어가며 필요한 것들과 어른의 역할에 대한 글을 주로 쓴다. <나이들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법> <가족습관> 등을 썼으며 <이호선의 나이들수록>을 글로 쓰고 영상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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