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매드랜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집(house)에 정착하길 거부하고, 밴이나 트레일러를 집(home) 삼아 거리로 나선 ‘노매드’(nomad, 유목민)들이 미국 사회에 급증합니다. 물론 다들 여러 이유가 있죠. 상당수가 경제적 사유로 그 길을 선택하긴 했지만, 가족의 죽음으로 방황하는 경우도 있고, 평생 기계처럼 일해 왔던 것에 대한 회의로 직장을 박차고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노매드랜드>는 그런 현대 유랑민의 삶을 내밀하게 그려냅니다.
경제적 위기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해 건설 경기가 바닥을 치면서, 대표적 건축자재인 석고보드의 수요가 급감하자, 2011년 네바다주 엠파이어 시에 있는 석고 공장이 88년 만에 문을 닫습니다. 그 공장 노동자들이었던 주민들이 일자리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면서, 그 도시 자체가 아예 지도상에서 사라집니다. 거기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왔던 ‘펀’은 남편이 죽자 그곳에 홀로 남게 됩니다. 가족도, 일자리도 없는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펀’은 밴 하나를 끌고 그곳을 떠나, 단기계약직으로 이곳저곳 떠도는 유랑민의 삶을 선택합니다.

<노매드랜드>는 그런 ‘펀’의 여정을 들여다보면서, 그녀가 거리에서 마주하는 여러 사람과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펀’과, 그녀와 잠깐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오는 ‘데이브’라는 캐릭터를 제외하곤, 전부 진짜 노매드들이 출연해, 극영화라기보다는 거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줍니다. ‘펀’ 역할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모습이 너무 리얼해, 영화에 출연한 노매드들이 그녀 또한 자기들처럼 유랑하는 노매드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여하튼 실재와 허구 사이에 자리 잡은 그 아슬아슬함이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노매드들이 떠도는 황야처럼 쓸쓸하고, 숨 가쁘게 기계처럼 돌아가는 자본주의사회 질서를 거부한 삶을 그린 만큼 아주 느립니다. 적막한 곳을 천천히 살펴요. 그러면서 정보와 속도, 그리고 화려함에 중독되어 있던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현대인들을 위한 해독제와 같은 영화라고 부를 만합니다. 혹시 지루해서 못 참겠다고요? 그만큼 중독되어 있다는 방증입니다.

인간들은 한곳에 정착해, 가족과 이웃을 만들어 사회를 형성하고, 법과 제도를 세우면서 문명을 건설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공간의 인위적 시스템에 함몰되어 특정 가치체계의 틀에 갇히게 됩니다. 그걸 ‘영토화’(혹은 ‘코드화’)라고 하지요. 그렇게 영토화 되면 우린 내부적 모순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사회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정신을 사물과 상품으로 대체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속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대표적 정체성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물화(物化)시키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사람들을 얼마짜리 벌이 일을 하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몰고, 어떤 집에 사는 지로 평가합니다. 암묵적으로 다 같이 돈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영화 속 노매드들은 그렇게 종속되길 거부하고 당당히 ‘탈영토화’를 선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마지막 인사”(final good-bye)를 하지 않고, “길에서 다시 봅시다”(See you down the road)라고 말합니다. 똑 부러진 결론과 결과에 집착하는 현대인들과는 달리, 여정과 과정으로서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편안한 보금자리를 제공했던 곳, 따뜻한 자매의 집, 화기애애한 가정의 식탁,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뒤뜰 등. 그 모든 곳은 가만히 있는데, 그 속에 함께 있던 ‘펀’은 계속해서 화면 밖으로 빠져나갑니다(frame out). 추억으로 먹고사는 게 우리 인간인데, 그녀는 심지어 과거 추억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려고 합니다.

<노매드랜드>엔 석양 장면이 반복적으로 유독 많이 나옵니다. 높은 곳을 지향하는 상승 코드는 어느 순간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장 중독이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그것으로부터의 ‘탈코드화’도 시도합니다. 내려가고, 정리하고, 쉬는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질문합니다. 무엇을 위해 달려왔나요? 왜 그랬나요? 그래서 지금은요?

임택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영화이론을 수학하고,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