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레이놀즈의 <점>, 문학동네어린이

피터 레이놀즈의 <점>이라는 책에는 학생 베티가 나옵니다. 베티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미술 시간이 끝나도록 아무것도 그리지 못합니다. 그런 베티에게 선생님은 ‘눈보라 속에 있는 북극곰을 그렸구나’ 말하지만 이 말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못 그리겠다는 베티에게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한번 시작해 보라’며 격려하자 베티는 화난 듯 연필을 내리 꽂았고 그렇게 점 하나를 도화지에 찍습니다. 선생님은 점 아래에 이름을 적게 하지요.
선생님은 이 도화지를 액자에 넣어 책상 앞에 걸어 놓습니다. 다음 시간이 되어 액자에 걸린 점을 발견한 베티는 이것보다는 잘 그릴 수 있다며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수채 물감을 꺼내어 점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아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점을 소중히 여긴 선생님의 마음이 베티에게 가 닿은 걸까요? 노란 점, 초록 점, 빨간 점, 파란 점. 그리고 다양한 색을 섞어 만든 점들과 크고 작은 점들. 가운데는 비우고 배경을 칠하여 드러나게 한 점까지. 온갖 점들을 그려갑니다. 그렇게 작품들이 쌓여 가고 얼마 후 열린 학교 미술 전시회에 베티의 작품은 벽면 가득 전시됩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전시회에서 베티처럼 그림을 잘 그리면 좋겠다는 아이에게 베티는 ‘너도 할 수 있다’며 하얀 도화지를 건넵니다. 아이가 삐뚤삐뚤하게 선을 하나 그리자 베티는 작품 아래에 아이의 이름을 적게 합니다. 점을 시작으로 베티의 그림 세계가 열렸듯이 선을 시작으로 또 다른 친구의 세계가 열리겠지요.
이 책은 수십 권의 그림책을 쓴 피터 레이놀즈의 첫 그림책입니다. 작가에게도 그림책이라는 장르에 첫 점을 찍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점은 베티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배경 점은 인물의 내면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연필을 내리꽂는 베티 주위에는 빨갛고 거친 배경 점이, 액자에 걸린 점 주위로는 감동 받았을 베티의 내면을 대변할 연노랑 점이, 작품 세계에 빠져 있는 베티 주위로는 창작의 과정을 표현하듯 다양한 색이 혼합된 점이 그려져 있습니다. 베티의 작품 세계가 점으로 발전했는데 작가의 작품인 그림책 자체에도 점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선생님의 존재가 첫 몇 페이지에만 등장한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선생님은 베티에게 붙어서 이런저런 코치를 해주지 않습니다. 시작을 못하는 베티에게 점을 찍게 해주었고, 아래에 이름을 적고 이 작품을 소중히 여겨 액자에 걸어놓고 시간이 지나 전시회를 열어주었을 뿐입니다. 선생님과 부모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선생님이 채색이 덜 된 부분을 색칠하게 하고, 점을 그렸으니 이번에는 선을 그리자고 권했으면 베티는 그림에 이토록 빠질 수 있었을까요? 창작의 두려움을 극복한 베티는 누가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그림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배려 받고 인정받았듯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아이를 같은 방식으로 이끌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림 그리기 뿐 아니라, 글쓰기, 코딩 등 창작을 하는 모든 것은 처음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매시간 시시한 걸 한다며 코딩 한 줄 짜지 않던 뺀질이 학생이 기억에 남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학생을 변화시킨 것은 가장 쉬운 수업을 하던 때였습니다. 핵심 코드는 단 몇 줄이지만 응용할 여지가 있는 수업이었습니다. 이때다 싶어서 옆에 붙어서 쉬운 건 알지만 해보자며 코드를 직접 짤 때까지 학생 옆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학생이 그동안 내용이 쉬워서 안 했던 것이 아니고 ‘제대로 못할까봐’ 불안해서 시작을 못했다는 것을요. 뺀질이 학생은 사실은 여린 학생이었던 것이지요. 학생이 처음으로 코딩을 제대로 한 날 학급 전체에 이 학생의 작품을 보여주었고, 친구들은 “오~”하는 감탄으로 인정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첫 코딩에서 점을 찍은 학생은 감사하게도 다음 시간부터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교사로서,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점 하나를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겠습니다. 또 첫 점을 찍은 어린이들의 결과물을 마음 깊이 기뻐해 주고 싶습니다. 5월. 아이들의 세계가 피어나고, 아이들이 더 행복해지는 어린이 달이 되면 좋겠습니다.

장시경
전산학을 전공한 후 성균관대 아동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고, 현재는 초중등학생들에게 프로그래밍, 3D프린팅, 로봇 등 다양한 IT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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