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2돌을 맞아

대한성서공회가 펴낸 <대한성서공회사>에는 성경이 이 땅에 전해진 경위, 즉 번역과 전파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과정을 따라 가보면 그 일을 위해 애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찾아 소개한다. <편집자 주>

1900년대 초반, 한국은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러일전쟁(1904) 이후 을사늑약(1905), 그리고 민족의 주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한일병탄(1910)까지, 이 땅에 삶의 빛이 꺼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불씨는 남아 1919년 3월 1일, 독립을 향한 민족의 의지가 큰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3·1운동을 주도했던 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3·1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좌절되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다. 이때 성경은 투옥된 사람들에게 위로와 자유를 주는 도구가 되었다. 자유를 위해 외치다가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성경은 위로와 평안, 자유와 소망을 공급해 주었다. 1920년에 출옥한 세 여학생의(이화학당일 것으로 추측) 고백을 들어보자.

여학생 1. “여러 해 동안 나는 성경이 없었는데, 성경을 받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특히 다니엘서와 욥기, 시편, 야고보서, 그리고 베드로후서를 즐겨 읽게 되었지요.”

여학생 2. “감옥에 있는 동안 나는 구약의 다섯 책과 신약전체를 일독했습니다. 내 마음에 항상 있는 구절은 요한복음 14:1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고 14:18이 큰 위로가 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여학생 3. “외롭게 갇혀 있을 때 너무나 성경을 보고 싶었습니다. 1919년 6월 3일에 나는 영어성경 한 권을 받았는데, 그것은 내 영혼에 축제를 갖게 했습니다. 8일간 매일 11시간씩 읽는 바람에 눈이 멀 지경이었습니다. 내 삶이 난파선, 혹은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을 때, 성경은 큰 기쁨을 주고 더 많이 읽고, 암송할수록 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서공회는 권서들을 통해 감옥에 성경을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당시 미국성서공회는 철수하고 영국성서공회만 남아서 이 땅에 성경 보급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성서공회는 투옥된 신자들을 위해 되도록이면 많은 신약전서를 보급하려고 했고,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용으로 단권성경도 넣어주었다. 성경 보급은 민족이 겪은 고난 속에서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면서 희망의 원천이 되었다. 특히 자유가 없는 감옥에서.
당시 활동하던 권서 중 한 사람은 성서공회에 이런 보고를 남기기도 했다.
“젊은 학생이 성경을 읽고 개종하였고, 감옥에 올 때에는 글을 알지 못하던 한 노인이 한글을 깨우치고 잠언을 모두 외웠으며, 다른 감방에 있던 17명의 죄수들은 2권의 잠언서를 몇 장씩 나누어 가지고 서로 돌려보기도 했습니다.”
권서들뿐만 아니라 함께 투옥된 기독교인들의 옥중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감옥은 마치 한글을 익히고 성경을 배우는 학교 같은 역할을 하였다.
훗날 일제가 민족 말살정책을 펼치며 조선말과 글조차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 때에, 그 암울한 시간을 견디고 버텨나갈 수 있었던 밑힘이 성경을 통해 한글을 익히고, 그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여겨진다.

민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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