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우나무, 브리타 테켄트럽 글·그림, 봄봄

주일이 되면 우리 부부는 예배를 마치고 두 곳을 방문합니다. 부모님 댁과 아들네입니다. 부모님 댁에 들어서면 아흔이 넘으신 부모님이 지난주보다 몸과 정신이 조금 더 쇠락해지신 모습으로 맞아주십니다. 그리고 아들네에 가면 손녀가 일주일 새 더 자라고 힘도 세져서 발로 차고, 옹알이도 하고, 깔깔 웃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뵈면 안타깝고 서글프고, 손녀를 보면 기쁨과 놀라움과 흐뭇함이 넘칩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조만간 부모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 갈 것이고, 언젠가는 아들, 며느리, 이 어여쁜 손녀도 우리를 따라 올 거라는 사실을요.
우리 문화에서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꺼려하고 죽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부인하려고 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직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생을 향한 관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재의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설령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 동안 더 지혜롭게 살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유럽 작가인 브리타 테켄트럽이 글을 쓰고 그린 <여우나무>(출판사 봄봄)는 동물을 의인화한 한 그림책이지만 어떤 훌륭한 소설 못지않게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겨울날, 숲에 살던 여우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지친 몸을 끌고 숲 속 공터로 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숲을 보면서 영원한 잠에 빠져 들어갑니다. 누워있는 여우의 몸 위에 눈이 쌓이고, 여우와 친했던 숲 속 친구들이 여우 옆에 하나 둘 모여듭니다.
부엉이, 다람쥐, 족제비, 곰, 사슴, 새, 토끼, 생쥐가 차례로 여우와의 추억을 이야기합니다. 부엉이는 아주 어릴 때 가을에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여우와 함께 누가 많이 잡나 내기를 했다고 회상합니다. 생쥐는 여우 할아버지가 해 지는 광경을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건 모두에게 아주 행복한 추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여우 옆에 앉아서 석양을 바라보곤 했으니까요. 곰은 여우가 아기 곰들을 돌봐 준 일을, 토끼는 여우랑 풀숲에서 술래잡기하던 날을, 다람쥐는 지난겨울 눈 속에서 여우가 도토리 파내는 걸 도와주었다고 말합니다.
여우와 쌓았던 추억을 되새기자 그들의 마음은 점점 더 훈훈해졌습니다. 그런데 동물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여우가 누워 있던 자리에서 조그만 오렌지 나무 싹이 올라오더니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새싹은 점점 더 커지고 튼튼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동물들이 밤새 여우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새싹은 조그만 나무로 자라있었습니다. 이제 동물들은 여우가 여전히 그들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주,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추억도 쌓이면서 나무는 점점 더 높이 자라 숲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나무는 숲 속 모든 동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새들은 나뭇잎 사이에 둥지를 틀었고, 부엉이는 높은 자리에서 새끼들을 키우고, 다람쥐는 나무줄기에 집을 마련하고, 곰과 사슴과 토끼는 나무그늘에서 낮잠을 잤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무는 여우를 사랑한 모든 동물들에게 든든한 힘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글도 아름답지만 그림 이미지가 매우 따뜻하고 정감이 갑니다. 숲 속 어느 나무보다도 높게 자라난 여우 나무의 기둥과 줄기, 잎은 모두 눈부시게 밝은 오렌지색입니다. 이 밝고 따뜻하고 넉넉한 여우 나무의 품 안에서 숲 속 친구들은 모두 평안하고 활기 넘치게 살아갑니다.
흔히들, 그림책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책의 독자는 0세부터 100세다”라고 합니다. 사실 이 작품은 어린이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더 적은 어른들에게 먼저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배우자, 자녀, 이웃, 친척, 친구들, 혹은 제자들에게 어떤 추억을 남겨주고 있는 걸까요? 그들은 우리가 떠난 다음 그 이야기로 인해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현은자
한국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및 한국 기독교 유아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성균관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이며, 생활과학연구소 그림책 전문가 과정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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