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령 천(千) 명이 함께 저지른
범죄라 할지라도 여전히 고독이에요.
따라서 범죄는 아무리 행운이 따른다 하더라도
항상 불행할 뿐이에요


사회학자들은 인간은 ‘M’으로 시작하는 두 개의 활자에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두 개의 M은 각각 ‘Mother’와 ‘Money’입니다. ‘Mother’가 인간의 정서를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가꾸어주는 ‘정원사’의 역할을 했다면, ‘Money’는 인간이 품었던 꿈과 미래를 성취해주는 ‘후원자’의 역할을 서로 분담해왔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나 20세기를 기점으로 ‘Mother’보다 ‘Money’에 더욱 집착하는 추세를 보이며, ‘money talks’, 곧 ‘돈이 말하는 시대’로 진입했다는 우려를 표합니다.

“돈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알베르트 까뮈의 희곡 <오해>(1943)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철학적 은유로 들려줍니다. 허름한 여인숙을 배경으로 5명의 인물만 등장하는 단출한 연극이지만, 배우들의 대사는 삶의 성찰을 담은 잠언으로 다가옵니다.
먼저 딸 ‘마르타’는 자신이 운영하는 가난과 절망의 상징인 여인숙을 떠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살인을 자행하는 냉혈한 여인입니다. 마르타는 여인숙 손님을 수면제로 잠들게 한 후, 강물에 던져 살해하고 지갑의 돈을 갈취합니다. 마르타의 관심은 오직 ‘Money’입니다. ‘Money’만이 자신을 원죄 같은 가난과 지옥 같은 형벌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어머니는 “일 년 내내 비만 내리고 하늘 끝조차 보이지 않는 이 땅을 떠나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는 딸의 살인을 정당화하는 말에 시달리지만, 20년 전 집을 나간 아들 ‘얀’과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남편으로 생의 의욕을 소진한 터라 어쩔 수 없이 딸의 범죄를 묵인, 방조하는 공범으로 전락합니다. ‘Money’를 선택한 딸 앞에 무기력하기만 ‘Mother’의 슬픔이 작품 곳곳에 흐릅니다.
이 희곡 1막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 마주한 딸 마르타와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방금 전 여인숙 손님으로 온 ‘카를르’라는 젊은이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젊은이에게 연민을 느낀 어머니는 딸에게 “죄를 짓는 일이 두 번째면 그때부터 습관이 되는 거란다”라며 범죄행각을 여기서 멈추자고 부탁하나, 부유해 보이는 그 젊은이를 그저 자신의 야망을 앞당겨 줄 도구로 여긴 마르타는 “어머니, 그 남자를 꼭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희곡 2막에서는 카를르와 그의 아내 마리아의 대화가 전개되는데, 여기서 이 젊은이의 신분이 밝혀집니다. 사실 카를르는 20년 전 집을 떠난 아들 ‘얀’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모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만, 자신이 버린 어머니와 누이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그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물질과 행복을 나누어주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여인숙에 찾아온 것입니다. 얀은 어머니와 마르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얀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릴 적 얼굴이 사라져서인지, 그들이 손님을 살해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에서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가족들의 반응에 얀은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이 여인숙의 음흉한 분위기로 인해 얀은 ‘자신이 돌아올 집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결국 그는 가족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다음날 아침에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 밤 늙은 하인이 건네준 홍차를 마신 얀은 깊은 잠이 들었고, 뒤늦게 그 홍차를 마시지 못하게 막으려고 얀을 찾아왔던 어머니는 잠이 든 젊은이를 보며 한숨을 쉽니다. 이후 마르타는 젊은이의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세어보며 만족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강물에 던져 살해한 후 ‘이제 내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맞이했다’고 미소 짓는 순간, 떨어진 여권을 통해 자신들이 살해한 젊은이가 아들이며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마르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던져진 강가에 투신합니다. 그러나 냉혹한 마르타는 자신을 남겨두고 떠난 어머니를 비난하며 “나는 어머니와 오빠 모두에게 버림받았다”고 절규합니다. 이후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 얀을 찾아 아내가 여인숙으로 오고, 그곳에서 마르타를 통해 사건전모를 알게 된 후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그 아내 마리아에게 “엄살 부리지 말아요. 당신은 남편을 잃었고, 나는 어머니를 잃었어요. 그러나 당신은 남편과 함께 여러 해 행복을 누리고 나서 단 한번 불행해진 거잖아요, 나는 평생 불행했거든요”라고 조롱한 후, ‘자살’을 암시하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감으로 이 희곡은 막을 내립니다.

마르타의 불행은 사실 ‘Money’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버지와 오빠가 떠난 세상에 대한 혐오, 박탈감에 중독된 것이 그녀를 추락시킨 이유였습니다.
문득 ‘이 작품의 제목이 왜 <오해>일까?’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오빠 ‘얀’을 낯선 젊은이 ‘카를로’로 ‘오해’해서인지, 아니면 ‘Money’가 인간을 불행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로 ‘오해’한 것인지 그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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