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돌봄’의 대명사라고 부른다. 가족 안에서도, 직장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는 언제나 살뜰히 돌보고 돕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아픈 얘기, 힘든 얘기들을 털어놓기 바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에게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누군가의 요구를 거절 못하고, 사람들의 온갖 이야기를 담아주기만 하던 그에게 공황장애가 찾아온 건 고통스럽지만,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돌볼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자신 안의 요구를 들어주고, 자기 안의 이야기를 꺼내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들려준 ‘강도 만난 자’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야기는 어느 유대인이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건으로 시작한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채로 길바닥에 내버려 두고 떠났다. 제사장이 그 길에서 쓰러진 자를 보았지만 피해 지나갔다. 뒤따라 레위인 또한 그를 보았지만, 역시 피해 지나갔다. 그 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 곳을 지나간다. 사마리아인은 쓰러져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달려가, 그 상처에 응급처치를 한 뒤,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본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라고 당부하기까지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잘 알려진 이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향해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행동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돌아보게 한다. 주변의 고통 받는 이들을 보고도, 우리는 제사장 혹은 레위인처럼 갈 길을 재촉하며 지나치지 않았는가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런데 길에서 상처를 입고 쓰러져있던 그 나그네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면 우리는 달랐을까.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 ‘나’를 보고도 우리는 못 본 체, 바삐 갈 길을 재촉하던 제사장처럼 지나치진 않았는지. 타인을 돕는 일이 쉽지 않은 만큼, 나 자신을 진심으로 돕고, 살피고, 돌보는 일도 용기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가능한 일이다. 상처받고 지쳐서,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는 나를 향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피고, 상처를 싸매주고, 쉴 곳을 마련해주고, 나의 갈 길을 되돌려 시간을 내어주고, 타인에게 돈을 맡겨가면서까지 치유를 위해 끝까지 나를 기다려주는 모습이 내 게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앞서 이야기한 그 남자는 주변인에게는 타고난 희생자이고, 조력자였다. 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누군가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부지런히 그 사람을 위해 움직이던 그는, 정작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아픔, 힘든 이야기는 억눌러왔다. 공황장애를 치료하며 자신의 내면을 살피기 시작한 그는 마음속의 소리 없는 호소와 눈물을 듣기 시작했다. 치유되지 않았던 고통으로 주저앉아있던 오래 전의 자신을 발견한 그가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돌보기 시작하면서 그는 내면의 균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인을 향한 돌봄에도 더 깊은 공감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자기돌봄’이란 자신의 아픔을 보고 지나치지 않는 일이다. 내가 나를 향하여 마음 차가워지지 않고 자신의 필요에 무감각해지지 않는 일이다. 그러한 자기돌봄이 충분할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해서도, 타인을 향해서도 온 몸과 마음으로 공감함으로써 함께할 수 있다.

위서현
전 KBS아나운서.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 객원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만남의 힘>, <뜨거운 위로 한그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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