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일인입니다>
노라 크루크 지음, 권진아 옮김, 엘리, 2020년


생각해보면 살면서 내가 내가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세대를 거쳐 몸에서 몸으로 유전된 기억이 나를 지배하면서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라고 느껴질 때 말이다. 사람들은 ‘아빠 닮았네, 엄마 닮았네’라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닮음을 평가한다. 하지만 우리의 몸에는 인류의 탄생 이래로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은밀한 생존의 비밀이 새겨져 있기에 이토록 닮아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장구한 세월 동안 어떻게 살아남아 ‘오늘의 나’라는 존재에 이른 것일까 하고 상상해 보면 평범한 일상조차 불현듯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나는 독일인입니다>의 저자 노라 크루크는 바로 이런 순간에 눈을 돌려버리지 않고 기억을 마주하기로 마음먹는다.

노라는 미국 뉴욕에 사는 전후 2세대 독일인이다. 나치를 경험하지 못했는데도 일상에서 ‘하일, 히틀러’라는 무신경한 농담을 마주한다. 때로는 대화 상대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일까 싶어서 조심하면서 죄의식, 수치심, 두려움 같은 복잡한 내면을 안고 살아간다. 실제로 노라는 독일인이라는 자부심으로 행여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물들게 될까봐, 11학년 때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분석해 자신의 입장을 내놓아야 하고, 괴테나 실러를 낳은 아름다운 모국어를 칭찬하지도 못하며, ‘영웅’, ‘승리’, ‘긍지’ 같은 단어와 최상급 사용은 피하고, 오래된 민요도 애써 배우지 않은 세대이기도 하다.

노라는 가족들 모두가 함구하는 그 전쟁 동안, 누구나 나치가 될 수 있었던 그 시기 동안,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어떤 삶을 택했는지, 어린 군인이었던 삼촌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묻기로 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그리움이 절절한 편지를 보낸 작은할아버지, 열여덟 살에 나치의 병사로 타국에서 목숨을 잃은 삼촌, 가족들의 회상과는 달리 나치당에 입당했었음이 드러나는 할아버지의 행적들을 오랜 자료 수집과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다. 때로는 그들을 비난하고 때로는 그들의 죄를 면죄 받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면서….

그런데 어느 순간 노라의 여정이 그녀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지고 가야 할 숙명처럼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한국인 역시 전쟁과 식민, 그리고 수많은 사회 갈등의 역사를 지나왔고, 지나는 중이다. 그래서 노라처럼 나 역시도 이내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시간의 범위를 보다 넓히다 보면 지금 이 시간을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자랑스러움보다 큰 부끄러움, 용서를 떠올릴 수조차 없는 분노, 신뢰를 저버린 배신, 용기를 압도하는 두려움, 미움으로 지워버린 사랑 등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역사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여,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이 위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살아남은 자로서 느껴야 하는 슬픔은 가해자이건 피해자이건 누구라도 피할 수 없다.

자, 그렇다면 ‘나는 한국인입니다’라는 고백은 과연 어떤 목소리여야 할까? 어쩌면 지금까지 내보였던 나의 역사, 그리고 내 가족의 역사, 더 나아가 내 나라의 역사를 아주 다르게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나에게는 노라처럼 이 두려움을 떨칠만한 용기가 있을까?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