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상담실에 많은 사람들이 문을 두드린다. 남편과 소통이 되지 않아 화가 난다는 한 여성, 진로 문제로 우울증에 빠졌다는 청년, 자녀 문제로 화병이 났다는 중년 여성, 자해 문제로 상담의뢰를 받은 청소년, 퇴직 후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중년 남성.
삶의 배경이 다르고,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다른 만큼, 저마다 고민과 이유도 모두 다르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똑같은 고민이란 어쩌면 없는지 모른다. 신기한 것은 상담실을 나서면서 하는 말은 참 비슷하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내가 이해받는 느낌이 들어요.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그의 상담이론인 ‘내담자 중심 치료’를 통해 <공감>을 강조하였다. 이후 현대 상담학의 여러 이론들 또한 공감이 심리치료의 주요 요인임에 동의하고 있다. 여러 내담자들이 동일하게 말하는 ‘이해받는 느낌’은 바로 이 <공감>이라는 상담기법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감이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보니, 주요 치료 요인이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경우가 많다.
“전 이미 공감을 많이 해주고 있거든요”, “아이 말에 공감한다고 했는데, 애가 마음을 안 열어요”, “공감한다고 애썼는데, 아내는 오히려 정말 자신을 모른다며 더 화를 내더라고요.”
나름대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며, 공감해주었는데, 왜 상대는 공감 받는다고 느끼지 못했을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으면서도, 막상 하고자 하면 쉽지 않은 것이 공감이다. 단순히 ‘나도 널 이해해’, ‘참 힘들었겠네”라는 말로는 깊은 공감에 이르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상담에서 이뤄지는 공감은 대체 어떤 공감이기에 내담자들에게 ‘이해받음’과 ‘무조건적인 수용’의 느낌을 주는 걸까.

공감에도 단계가 있다. 듣기, 이해하기, 반응하기, 기억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섬세하게 잘 듣는 것은 공감의 첫 계단을 밟는 것이다. 그런데 듣는 데서 끝난다면 공감일 수 없다. 들은 말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내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그를 이해하면 내 판단과 평가가 개입될 소지가 많다. 그렇기에 그의 세계 속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고 있을지, 최대한 그 사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가 표현한 말이나 감정이 지닌 ‘내면적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된다. 그렇게 상대방과 동일한 몰입의 수준에서 이해한 바에 대해 표현하는 것이 다음 단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아차린 그 사람의 마음을 내가 기억해주는 것까지가 공감의 과정에 포함된다.
상담자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첫 번째 만나는 산이 바로 ‘정확한 공감’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숱하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공감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내 방식대로의 이해, 내 입장에서의 헤아림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삶으로 들어가 그가 세상을 어떻게 관찰하고, 경험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지식과 작업을 수반한 ‘정확한 공감’ 반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 데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칼 로저스는 “공감이란 자신의 눈에 그의 세상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모른다고 하여도, 한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진심은 이런저런 단계를 단번에 뛰어넘어 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큰 열쇠일 것이다. 그러한 진심의 공감들이 모인다면 상담현장에서 피어나는 마음의 꽃들이 우리의 삶 곳곳에서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위서현
전 KBS아나운서.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 객원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만남의 힘>, <뜨거운 위로 한그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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