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발레>
최민영 지음, 위고, 2018년, 148쪽


결혼할 때 장모님께서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반드시 한 이불을 덮고 자라고 하셨건만, 나는 부부의 침대에서 쫓겨난 지 오래다. 갓난아기도 아닌 다 큰 녀석들이 아직도 엄마와 붙어 자기 때문에, 나는 싱글 침대를 나란히 붙여 놓고 쪽잠을 청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당연히 방은 침대 두 개로 가득 차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녀석들은 요즘 내가 밤마다 코를 곤다며 다른 방에 가서 자라고 난리를 친다.
가족의 마루. ‘코로나 감옥’ 탓으로 식구들이 집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우리 집 거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장모님은 세탁실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빨래를 햇볕에 말리기 위해 거대한 건조대를 전망 좋은 통창 한가운데 설치하셨고, 이름만 들어도 건강해질 것 같은 로푸드(raw food)와 마크로비오틱(Macrobiotic) 등의 요리를 배우는 처제는 최첨단 요리 도구들을 부엌인지 거실인지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틈새 공간에 들여다 놓기 시작했으며,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대청소 할 때를 빼고는 장난감들을 종류별 혹은 영역별로 늘어놓았다. 이 집에 이보다 더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결코 평정심을 잃지 않을 법한 아이들 엄마의 너그러운(?) 성품….
그래서 매트. 이 한 몸 편히 둘 데 없는 이 집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노트북조차 올려놓기 어려울 만큼 물건들로 빼곡한 집에서 그나마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아무튼, 발레>라는 책 때문이다. “그래도 안 힘든 척하는 게 발레다”라는 부제처럼 이런 우리 집이지만 우아한 나만의 세계를 상상하고 싶었다. ‘공간’과 ‘인간’ 사이에서 ‘대우주’와 ‘소우주’라는 개념으로 세계를 이해한다면 ‘우리 집’과 ‘나’ 사이에서도 내적으로 향하는 공간 개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마치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바닥에 흩어져 있는 장난감들을 밀어내고, 그 사이에 우리 가족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한 평짜리 공간을 마련하였다.

“발레에서 아름다움의 핵심은 어떤 동작이든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해내는 것이다. 그건 우아함의 본질이기도 하다. 격렬한 감정이나 견디기 힘든 고통을 꼭꼭 씹어서 소화한 뒤 한 단계 승화하는 것이다. 무대 위의 발레리나는 어떤 순간에도 배역이 아닌 무용수 자신의 불안이나 통증을 날것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 본문 중에서

나는 어른이다. 아주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발레 스트레칭 동작 하나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 말 안 듣는 몸뚱이를 늘리고 비틀고 잡아당기면서 내 몸을 구석구석 찬찬히 순서대로 돌아보았다. 틀어진 척추, 굳어진 골반, 둥글게 휜 무릎, 구부정한 등허리까지….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내 몸에 무관심했던 것인가? 자책감으로 흠뻑 땀을 흘린 다음에는 불규칙해진 호흡을 가지런히 다스리며 다시 책을 펼쳤다. 그래, 나는 어른이니까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척 견디며 우리 집의 왕인 것처럼 품위 있게 우리 집 아이들과 가족들을 바라보리라~.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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