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짜 나일까?>

다비드 칼리 글, 클라우디아 팔마루치 그림, 나선희 옮김, 책빛

그 시절, 나는 젊었고 몸의 에너지에도 여유가 있었다. 잡지나 책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종이로 된 제품을 팔아서 어떻게 회사의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먹고 살았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몹시 바빴다는 것이다. 나는 필자의 원고를 받아서 정리한 다음 디자이너에게 넘기고 다시 수정 보완하는 편집 일을 했다. 회사에서는 날마다 책을 더 많이 펴내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더 많은 책을 찍어내야 할지 계산했다.
편집 일을 했지만 종이가 어떻게 책으로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팔려나가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마케팅부서나 영업부서 직원들을 만나기도 하며 창고에도 들락거리고 도매상이나 서점에도 들려보았지만 책이 어떤 경로로 독자의 손에 도달하는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다. 그들 또한 내가 책을 어떻게 편집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나는 내 일에 만족했다. 처음에는 조금 피곤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조금씩 더 피곤해졌다. 어느 날, 회사는 한밤에도 남아 있으라고 했다. 마감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면서 사흘만 그렇게 일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난 후에도 회사의 요구는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늦게까지 때로는 밤새워 일했다. 저녁이 되면, 피곤이 몰려왔다. 종종 사무실에서 잠들기도 했고, 나중에는 집까지 거의 기어가다시피 했다. 다행히 고생한다며 회사에서 챙겨주는 밥은 맛있었다. 문제는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서 함께하는 식사가 아니라 회사 사람들과 함께하는 식사였다는 점이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나의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들이 나의 가족이나 친구 같은 사람들이 되어 가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위 내용은 오래 전 직장 생활에 대한 나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기술한 내 이야기가 그림책 <누가 진짜 나일까?>의 이야기와 90퍼센트 같아서 너무 놀랐다. 하는 일만 다를 뿐이지 지구 반대편 스위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사는 저자 다비드 칼 리가 내가 경험한 내 인생 이야기를 하다니. 덕분에 지금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나의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그림책 <누가 진짜 나일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반전은 이제부터다! 여기서부터는 이것이 나의 이야기인지 이 책의 이야기인지 솔직히 분간이 되지 않는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책 제목에서 예상했겠지만 몸뚱이가 두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았던 당시 내 인생에서 나를 대신할 내가 생겼다. 회사 사장님이 추천한 피로회복실 같은 곳에 가서 따듯한 욕조에 몸을 담갔을 뿐인데 완벽한 나의 복제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복제인간이 생겼으니 나는 회사를 관둘 필요가 없어졌다. 복제인간은 집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은행 업무를 보려고 줄을 서는가 하면, 생일을 맞이한 엄마에게도 전화를 걸어 줄 수 있었다. 또 개를 산책시키고, 세탁소에 맡긴 세탁물을 찾고, 정원을 손 볼 수도 있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매우 바쁜 한 달을 보내고 마침내 집으로 퇴근하던 날!

나의 복제인간이 내 집에 있었다. 창 너머로 내 옷을 입고 내가 좋아하는 안락의자에 앉은 내가 보였다. 내가 밤새 힘들게 일하는 동안 나의 복제인간이 내 집에서, 나를 대신해, 나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가족 모두 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처음에는 엄청 충격을 받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이런 의심이 들었다. 혹시, 사실은 내가 복제인간이 아니었을까? 회사에서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복제인간인 나의 몫이며, 복제인간이 아닌 본래의 나는 집에서 자신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을까?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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