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대학 역사학과 교수 유발 하라리는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굶어 죽는 사람보다 너무 많이 먹어 죽는 사람이 많아졌고, 질병으로 죽는 사람보다 나이 들어 죽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며,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고 서술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시각에 의하면, 이 시대의 인간은 가난과 기아, 질병 심지어 죽음까지 극복이 가능한 존재로 설명됩니다. 과거 가난, 질병, 죽음과 같은 영역은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만 가능했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태복음 6:25)에 대한 해결능력을 이제 인간이 갖게 되었고, 인간은 이제 하나님께 하셨던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한 ‘호모 데우스’(Homo Deus), 곧 ‘신(神)이 된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견해에 따른다면 슬프게도 이 시대는 ‘신은 없다’와 ‘신은 죽었다’를 지나 이제 ‘신은 필요 없다’의 시대로 진입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호모 데우스’로 지명(指名)하기를 거절합니다. 오히려 인간을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마태복음 12:20)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마태복음 11:28)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섬세한 보호와 치유, 그리고 ‘쉼’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로 설정합니다.

그럼에도 신의 지위를 탐내는 ‘야심(野心)’에 붙들린 인간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야심’은 위험하고 무서운 감정입니다. ‘야심’을 가리키는 라틴어 ‘암비티오(Ambitio)’는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선동하며 돌아다니다’의 뜻을 갖습니다. 까닭에 상대방 후보를 무너뜨리기 위한 흑색선전도 마다 않습니다. 따라서 ‘암비티오’는 ‘야비하다’의 뜻도 함의합니다. ‘야심’의 의미를 더 실감 있게 표현한 것이 한자어 표기입니다. 한자어 ‘야심(野心)’은 뜻풀이 그대로 ‘들(野)에 사는 짐승의 마음(心)’을 말합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의 도리에 어긋난 행위를 가리켜 ‘짐승의 행위’인 ‘야만(野蠻)’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심’은 ‘야만’과 매우 닮은 기질입니다. 짐승이 생존을 위해 사냥을 마다 않듯, 야심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기에 지켜야 하는 도덕적 가치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드>에서,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맥베드에게 “장차 네가 왕이 될 것”이라는 세 마녀의 예언을 거절 못한 채, 아내 벨로나의 충동에 무너져 자신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주었던 국왕 덩컨을 살해하여 정권을 탈취한 후 평생 악몽에 시달리던 맥베드. 그를 몰락시킨 원흉은 짐승의 마음을 닮은 ‘야심’이었습니다. 청교도 신학자 토머스 왓슨이 “야심(野心)을 위해 양심(良心)을 포기하는 것이 타락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야심과 양심의 치열한 격전지’입니다.

올 새해는 야심이 양심에 패하는, 그래서 양심이 야심을 가볍게 제압하는 품위 있는 날들로 채워지기를 소망해봅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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