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내가 책 소개 글을 쓰는 현재의 나를 본다면 아마 기가 찰 것이다. 책을 즐겨 읽지도 않았고, 큰 관심도 없었던 내가 심지어 책을 만들기도 하다니! 세상 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나처럼 책을 좋아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책을 만드니 책이 잘 팔릴 리가 없는 거라고 자책이라도 해야 할까.
과거의 나에 대한 후회 때문일까, 아빠 된 입장에서 나는 아이들이 스마트폰이나 게임기에 열중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책에 관심을 기울이기 바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학창시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이 억지로 책을 읽게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게임에 빠져들 듯이 책에 빠져들기를 기대한다면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돌이켜 보면 책읽기는 나에겐 항상 의무감을 동반했다. 초등학교 때는 독후감 상장을 받으려고 학교에서 정해주는 책을 읽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시험을 잘 보려고 대표 고전 필독서 중심으로 책을 읽었다. 대학교 때는 지적 과시욕이나 허영심 때문에 쓸데없이 장황한 책을 읽었다. 이러한 책읽기 과정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려고 책을 읽었다거나 혹은 너무 재밌어서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거나 같은 ‘소중한 책읽기 경험’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의 강요로 책을 읽거나 혹은 책이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니까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먹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책을 읽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아빠의 생각을 아이들이 읽기라도 한 것일까? 요즘 우리 집 아이들 손에는 교양 만화류 책이 들려있다. 만화라는 형식에 크게 거부감이 없을뿐더러 심지어 ‘교양’을 동반하는 만화책이니 ‘아이들 책 읽는 습관 키우기’는 이쯤해서 만족하는 게 좋을라나 하고 망설일 때쯤 실마리가 되는 신통방통한 방법이 떠올랐다.

여자들이 남자들에게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세 가지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그리고 무협 이야기라고 했던가. 우리 집 사내아이들의 책읽기도 바로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로부터 접근하기로 했다. 군대는 아직 가야할 나이가 멀었고, 축구는 클럽에서 신나게 뛰고 있고, 마지막 남은 선택지는 바로 무협. 이소룡과 성룡 같은 영화 속 협객을 모르더라도 오늘도 아이들은 망토마냥 얇은 여름이불을 두르고, 종이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장난감 칼을 들고, 먼지를 일으킬 거면 밖에 나가서 놀라는 잔소리까지 감수하면서 불세출의 영웅을 꿈꾼다. 아이들의 무협 역할 놀이에 스토리를 부여한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지?
가장 먼저 떠오른 책은 고전 <삼국지>였지만 아이들도 익히 아는 내용인지라 좀 진부할 것 같았다. 내 나이 세대에게 인기였던 <영웅문>도 생각났지만 아이들이 읽기에는 너무 이르고 한물간 느낌이었다. 그래서 뭐 좀 쌈박한 게 없을까 하고 찾고 찾은 끝에 발견한 책이 바로 <건방이의 건방진 수련기>이다. 유일한 피붙이 할머니를 잃은 초등학교 2학년 건방이가 우연찮은 기회에 권법의 달인 오방도사를 만나 오방권법을 수련하면서 겪는 삼 년간의 과정을 그렸다. 손에 돌의 힘을 씌우는 ‘수석술’, 훌쩍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도약술’ 등 활극은 말할 것도 없고, 건방이와 도꼬마리의 배신과 화해, 스스로 깨달음을 찾아가는 무술 여행, ‘전설의 검’을 둘러싼 암투와 예언 등 흥행 요소를 모두 갖췄다. 특히 실패를 거듭하지만 다시 일어서서 도전할 줄 아는 권법을 수련하는 건방이와 자신의 약한 면을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더 칼처럼 냉랭하고 독하게 검법을 수련하는 초아가 마음속에 감추어 둔 아픔을 해소하면서 보여주는 우정은 성장기 풋풋한 연애 감정도 불러일으킨다.
앉은자리에서 1권부터 5권까지 모두 읽어버린 다음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또 읽고 또 다시 읽고를 반복하는 아이들이 신기한지 아이들 엄마는 <건방이의 건방진 수련기>를 펼쳐보며 “남자아이들은 하릴없이 이런 소설을 왜 좋아하는 거야?” 하고 의문을 던졌다.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살짝 민망해졌지만 나는 몰래 돌아서서 온라인 서점에서 <건방이의 건방진 수련기>를 오늘도 검색했다. 5권으로 대장정을 마무리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6권이 어서 빨리 나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꼴이라니. ‘소설가 천효정 선생님, 부디 파이팅해 주세요!’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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