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러니까 언어는 시대를 가장 예민하게 반영하는 거울 중 하나다. 한때 너도나도 사용했던 신조어가 1, 2년만 지나도 낡은 언어가 되어 버리는 게 작금의 현실.
2016년 즈음 유행했던 ‘헬조선’ 혹은 ‘흙수저’ 같은 사회적 신조어도 이제는 그 유통기한을 다했다. 네 글자도 두 글자로 줄여서 말하는 분위기가 이어지면서는 그 줄임말 생산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언어 세계는 역동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혹시 ‘환타’가 어떤 단어의 줄임말인지 아시는지? 아침마다 미세먼지 농도를 체크해야 하는 최근 대기상태를 반영한 최신 줄임말이라는 게 힌트.

환경주의와 생태주의는 어떤 차이?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지구의 환경 위기’를 다루는 용어 또한 예민하게 달라진다. 다시 말하면 “인류가 직면한 재난을 어떻게 대면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 바탕에 환경문제는 산업화와 더불어 나타난다는 전제가 있다. 산업화가 가져다 준 물질적 풍요와 생산성 증진의 어두운 면이 환경재난을 낳고 있다는 것.
이런 전제 위에 생태철학자 한면희 교수는 “산업화에 배인 전통적 세계관과 이념을 그대로 견지하면서 환경재난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시도”를 ‘보수적 환경주의’(conservative environmentalism)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전통 세계관을 그대로 견지한다는 의미는 ‘자연을 도구화하는 관점을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 용어에는 서양 전통 사상의 인간 중심 세계관이 배어있다.
반면 “산업문명의 생활양식과 사회제도가 환경재난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는 새 대안으로 환경재난을 원칙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은 ‘진보적 생태주의’(progressive ecology)로 명명할 수 있다. 생태주의 안에도 여러 갈래의 사상이 있지만 모두 “인간 사회는 자연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은 인간에게 도구를 넘어선 가치를 갖는다”는 공통점을 갖는다는 게 한 교수의 분석이다.
환경문제라고 부르느냐, 생태문제라고 부르느냐에 따라 환경재난에 대한 해법 또한 달라지는 셈이다.

애완동물일까, 반려동물일까
‘환경’과 ‘생태’ 만큼 눈에 띄게 그 사용법이 달라지고 있는 단어로 ‘애완동물’과 ‘반려동물’을 들 수 있겠다. 이 또한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혹은 고양이를 어떤 존재로 대하느냐가 분명하게 반영되는 용어다. ‘애완(愛玩)’이라는 단어가 ‘동식물이나 공예품 따위를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보며 귀여워함’이라는 뜻으로 생명체를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장난감 정도로 여긴다면, ‘반려(伴侶)’는 삶을 함께 하는 존재로 여기며 존중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얼핏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쓰는 게 더 옳다고 여겨지지만 두 가지 중 어떤 단어를 써야 한다고 당위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철학자 최훈은 한 칼럼에서 직관과 도덕적 추론을 통해 ‘반려’라는 단어는 동물에게 붙이기 부적절하다고 논한 바 있고, 누군가가 나는 동물을 정말 가까이 두고 사랑하며 귀여워하므로 ‘애완’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다고 할 때 이런 태도를 평면적으로 동물을 사물화한다고 여기긴 어렵기 때문이다.

점차 사회가 다원화되고 자연 및 다른 생명체와의 공존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는 환경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를 바라보는 ‘말’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다. 이럴 때 단순히 어떤 용어가 더 옳다고 단정 짓기보다 그 쓰임새의 변화를 따라가며 내가 속한 시대를 읽어내고,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곰곰이 성찰해보는 태도를 가진다면 어떨까. 그때에야 비로소 나를 둘러싼 문제와 내 곁에 있는 다른 생명을 부를 ‘말’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환타’는 ‘환기타임’의 약자라는 정답을 새해선물로 드려야겠다. 추운 겨울에도 맑은 공기를 위해 ‘환타’는 꼭 잊지 마시길.

<참고문헌>
한면희 (2010). 현실 녹색정책의 이념과 생태주의 사상. 『동서사상』, 8, 161-184.
최훈(2018). 내가 반려 아닌 ‘애완동물’을 주장하는 이유. <한국일보> 2018.2.8.

박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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