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를 보면, 먼 방랑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청년 캉디드가 밭에서 일을 하는 노인을 보고 “어찌 일만 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노인은 캉디드에게 “젊은이여, 노동을 하면 권태와 타락과 궁핍이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라고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노동은 생계수단을 넘어 인간에게 권태와 타락과 궁핍을 멀리하게 해주는 신비입니다.

먼저 노동은 ‘삶의 권태’를 이기게 해줍니다. ‘권태(Boredom)’라는 말은 고대영어 ‘Bore’에서 유래했는데 ‘송곳으로 구멍을 뚫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 것이 너무 단순하고 지루했던 이유에서 ‘권태’를 의미하는 단어로 정착된 것입니다. 문제는 “권태는 탐욕보다 더 많은 노름꾼을 만들고, 갈증보다 더 많은 술꾼을 만들며, 절망보다 더 많은 자살을 만든다”라고 작가 찰스 콜튼이 <라콘>에서 밝혔듯이 권태는 ‘삶을 소리 없이 교살(絞殺)하는 악덕’입니다. 그러니 매 순간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수고하는 그 심장 속에 ‘권태’가 깃들 단 ‘한 평의 공간’도 허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노동이 주는 두 번째 유익은 ‘타락과 방탕’을 제압해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안에서의 노동’은 ‘성전 안에서의 종교적인 행위’보다 결코 열등한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의 위임통치를 맡기셨습니다. 이후 아담과 하와는 마치 정원사가 화원을 가꾸듯 에덴을 돌보았습니다. 이는 에덴에서도 ‘거룩한 노동’은 있었다는 사실의 반영입니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람이 노동하는 순간만큼은 죄에 대해 무관심하게 된다”라고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방탕과 타락은 ‘일에 싫증을 내는 한가로운 사람’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악덕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세신학자들은 게으름을 ‘7가지 죄악’ 중 하나로 규정하고 “게으른 사람은 악마의 베개이다”라고 경계했던 것입니다. 고대 로마인들 역시 게으른 사람을 가리켜 ‘왼손이 두 개인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큰 힘’이 필요한 일을 할 때 ‘오른손에 비해 힘을 못 쓰는 왼손 두 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듯 ‘게으른 자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입니다.

노동이 주는 세 번째 유익은 ‘삶의 빈곤’을 추방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사회학자들은 21세기의 지구촌을 ‘배고픈 지구’라고 부릅니다. 75억 인구 중에서 절대빈곤에 노출된 인구가 8억이며 그중 먹지 못해 죽는 10세 미만의 어린아이가 5초에 한 명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진 자들의 탐욕이 아니었다면 이 숫자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저들은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굶겨죽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노동은 빈곤과 굶주림에 속한 사람들을 살려줄 수 있는 실질적 수단입니다. 이 시대는 땀을 흘리지 않고 오직 편히 살려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숭고한 가치를 위해 지칠 만큼 노동하는 사람의 이마에 솟는 그 ‘땀’이 ‘성물(聖物)의 자격’을 지녔다는 사실은 전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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