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세기 아테네 왕이었던 페이시스라토스는 ‘메덴 아간’의 삶을 보여주었던 선한 권력자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현자 솔론이 말한 것으로 알려진 ‘메덴 아간’은 ‘아무것도’라는 그리스어 ‘메덴(Μηδὲν)’과 ‘지나치게’라는 ‘아간(​ἄγαν)’이 조합된 어휘로서 ‘아무것에든지 지나치거나 치우지지 않게’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아테네 축제에 참여하던 왕의 딸을 흠모하던 한 시민이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분노한 왕비가 두 팔을 잘라 공주의 수치를 갚아 달라고 호소하자 페이시스라토스는 “그대여,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벌준다면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란 말이요?”라고 말한 후, 그 사람에게 ‘너의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두 번 치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잘못에 대한 책임’은 묻되 ‘잘못에 대한 분노’는 알맞게 조절했던 페이시스라토스는 이후 아테네 시민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됩니다.

사실 삶의 대부분 비극은 ‘메덴 아간의 없음’에서 발원됩니다. 곧 스스로 ‘지나침’과 ‘치우침’을 통제하는데 실패할 때 비롯됩니다. 낮은 자존감에 눌린 사람에게서 ‘메덴 아간’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연약한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극도로 예민하여 작은 상처나 불이익에 지나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낮은 자존감을 지닌 사람은 절제 못한 감정의 발산 이후 곧 자책에 시달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신뢰를 갖지 못하게 되어 이후 스스로 책임 있게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선택 장애’를 앓게 됩니다. 곧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주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타인에게 전적 의지하는 타율적 삶을 선택합니다. 이런 삶을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혼조차 남의 집에 세(貰)들어 사는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자신에게 불만이 많은 낮은 자존감을 지닌 사람일수록 ‘메덴 아간’을 학습해야 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최소화시켜줌으로 상처와 상실을 감소시켜주는 촉매제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구나 삶은 초행(初行), 곧 ‘처음 가는 길 ’입니다. 따라서 삶은 ‘서툰 투박함’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갖습니다. 그러니 그 미숙과 서투름을 지나치게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실수’를 ‘실패’로 단정하고, 또 ‘실패’를 ‘패배’라고 섣불리 단정하는 ‘잘못된 완벽주의’는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 삶을 패배감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 앨빈 토플러는 “21세기의 문맹자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실수 이후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길’을 배웠다면 그 실수는 ‘서툰 성공’보다 훨씬 유익합니다. 따라서 실수한 자신에게 약간은 너그러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진작가 닉 나이트의 말처럼 “삶은 아마도 우리가 만들어낸 실수들로 지금보다 더 다듬어지고 나아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길’을 잃어 본 실수 이후에 ‘지도’를 만들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진정한 능력은 ‘남’보다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보다 더 잘하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나로 살기 위해 필요한 삶의 철학, 그것이 ‘메덴 아간’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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